[최요한 시사평론가]
주류질서의 교체
제가 드리는 말씀은 주류세력이 아닌 주류질서입니다. 좀 학술적이고 무거운 이야기이긴 한데,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세력을 의미하는 ‘그룹’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고, 질서를 의미하는 ‘규범’이 바뀐다는 겁니다.
주류질서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의 메인스트림을 의미하는데, 한 사회의 다수 구성원이 공유하는 지배적인 가치, 규범, 그리고 권력 구조를 의미합니다. 그 사회가 유지되고 작동하도록 만드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쉽게 말씀드려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는 본능의 문제를 넘어,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옳다고 믿는 도덕적 기준이나 지켜야 할 법, 윤리관 등 ‘보편적 규범과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류질서의 교체라는 것은 바로 이 ‘보편적 규범과 가치’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우리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주류질서를 바꾸었다, 또는 그 단초를 마련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혁명’이라면 ‘87년 6월 시민혁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록 철저하게 저평가되어 있지만, 87년 6월 항쟁은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이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정확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다른 시간에 하지요)
87년 6월 항쟁과 주류질서의 교체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문명에 대해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역사가 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과 응전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고 붕괴하고 해체된다는 것인데, 이에 딱 들어맞는 국가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입니다.
<대단히 저평가 된 87년 6월 시민항쟁은 거의 유일하게 한국의 주류질서를 바꾸는 사실상 ‘혁명’이었다. / 출처 : 나무위키>
대한민국이 성장하면서 겪은 우여곡절은 말을 하면 입이 아프지만, 처음에는 저개발국들이 으레 그러하듯 강력한 1인 독재정권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남(南)의 박정희나 북(北)의 김일성이나 모두 도긴개긴입니다. 심지어 쏘련 스탈린의 경우 1년에 19% 경제성장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더욱 긴장했었지요.
자본부족-자원부족 국가인 한국에서 넘쳐나는 것은 인적자원뿐인데 이 조건 아래서 박정희정권은 정부 주도하의 산업화전략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은 환한 빛을 발했지만, 그 시대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역시 하염없이 커져만 갔습니다. 온갖 모순이 축적되고, 정치적 격변을 몇 차례 겪으며 응축된 모순이 폭발합니다. 그것이 87년 6월 시민항쟁입니다.
이후 기존의 주류질서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민주화 이후 갑자기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의 촉발점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주류질서가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것, 즉 먹고 사는 일에 대해 해방 이후 ‘구주류’가 가장 크게 실패한 시점이 바로 이 시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동시에 ‘신주류’로 떠오른 김대중 정권이 가장 큰 성공의 업적을 쌓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축소되는 보수진영
이 시기를 전후해서 ‘구주류’에 가장 격렬하게 맞서 싸우던 상징성을 가진 운동권 인사들이 정치권으로 대거 유입됩니다. 바로 386 정치인들의 탄생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486, 586, 이제는 60대가 넘어서 686이라고도 불립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신주류’로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고, 이들이 주류질서의 축으로 한국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한국사회는 대단히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세계화·정보화의 새로운 세계적 추세에 매우 적극적으로, 선도적으로 부응하여 인프라를 구축하고,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2000년에는 세계 최초로 인터넷 사용인구 1,000만 명 시대를 열게 되면서 우리 사회의 주류질서는 더 이상 과거의 반공주의와 보수 기득권에서 멀어집니다. 여전히 분단체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과거와 같이 움츠리지 않았습니다. 문화적 차원에서도 기성세대가 주름잡던 분위기에서 젊은 층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이른바 K컬쳐의 새로운 주류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보수진영이라 불리는 쪽은 아직도 그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이들로 가득했습니다. 한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고했던 보수진영은 이제 차츰 주류질서로부터 밀려나며 그저 “라떼는~”을 연발합니다.
보수진영의 최전성기라는 신한국당-한나라당은 대한민국 보수정당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었던 시기이었습니다. YS 덕분이겠지요. 하지만 이회창의 등장 이후 당의 기조가 ‘강경보수’로 회귀했습니다. YS의 민주계를 품지 못하고 민정계를 품으면서 비극은 벌어집니다. 시대는 과거의 냉전과 반공, 친미라는 개념과 결별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강경보수는 이를 채택해서 밀고 나왔고, 노무현 정권에서 등장한 소위 ‘아스팔트 부대’, 현재 보수 극우화의 출발 격이 되는 이들과 제도권 보수정당은 손을 잡습니다. 외려 보수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점차 축소되었습니다.
중도보수까지 품었던 보수진영은 아스팔트 보수와 손을 잡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상당한 진전을 보였으나, 박근혜 집권 후 급격히 올드보수로 회귀했습니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던 김종인을 팽하고 올드보이들이 진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신(新) 386들이었습니다. 1930년대 생으로 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80세를 바라보는 세대가 전면에 나서게 되니, 중도보수는 이탈할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 박근혜 탄핵 이후 새누리당은 강경보수가 주류인 정당이 되었습니다. 12.3 윤석열 내란 이후에는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요.
여전히 뿌리박지 못하는 진보진영
해방 이후 보수가 되었든 진보가 되었든 주류는 일정부분 책임을 졌습니다. 그리고 70년대~80년대 독재정권과 싸워서 대한민국 민주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그룹이 정치적 민주화에는 책임을 다 했지만, 딱 거기까지만 이었습니다. 더 폭넓은 민주주의, 더 깊은 민주주의를 향해서는 무책임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늘 교문 앞과 회사 문 앞에서 멈춰 서버렸다.”
그들이 쌓아올린 그 빛나는 금자탑은 실제 가정과 회사, 조직에서는 전혀 작동이 되지 않는 수구적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독재자와 닮아갔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는 바뀌어 갔는데 그들, 찬란한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침투한 곳은 민주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더 심하게 노동자를 쥐어짰고, 더 심하게 반민주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정치인이 되었을 때 국민적 기대는 과거의 그 정의로움을 변질시키지 말고, 국민들이 먹고 살고, 유능하게 치세를 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과거만 부여잡고, 과거의 훈장만으로 백년을 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무능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가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류질서 정치인이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국민적 살림살이를 2차 3차로 밀어내고, 과거의 영광과 경험만이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정체성’ 정치만 남았던 것입니다.
지금의 젊은 층이 보수화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제는 686이 된, 젊었던 운동권들의 모습이, 극우 보수들의 모멸차고 이기적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시대에도, 국민들 사이에도, 지역에도 뿌리박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미래의 주류질서이어야 할까?
아마 전 세계적으로도 대한민국과 같이 압축성장과 압축해체를 모두 경험하는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강력한 힘으로 모든 부문을 압축적으로 성공했기에, 오히려 더 쉽게 무너지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큽니다. 우리 현재가 병들었고, 무너진다면 정확하게 현재의 상황을 진단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상태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린 어떤 상태일까요?
제가 보기에 최근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떤 분기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바닥을 치고 지하까지 떨어졌던 한국 경제는 지난 1분기 GDP가 전기 대비 1.7%를 기록하면서, 발표된 주요 22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코스피는 이 글을 쓰고 있는 6월 1일 오전 11시 40분 현재 8,858.10을 기록하면서 곧 9000이라도 뚫을 기세입니다. 한국의 여권파워는 세계 최상위권이라고 하고, 정부는 K-컬처를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소프트파워 최강국으로서 면모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과거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해 총체적 난맥상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5.18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조롱하고, 이를 상업적 마케팅용으로, 정치적 편 가르기 용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버젓이 존재합니다. 또 이들과 궤를 같이 하는 탄핵당한 대통령이 과거의 향수에 빠진 이들에게 구애의 손짓을 하면서 선거 전면에 나서기도 합니다.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장면이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판단의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요?
허나, 미래의 주류질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겠으나 분명히 탈이념적일 것만은 사실입니다. 현재의 진보나 보수 모두 이념적 기초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미래의 주류질서는 이념으로부터는 벗어날 것이라고 보입니다. 현재 힘을 발휘하고 있는 연고주의나 지역주의 등 기득권 카르텔은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는 현재의 정치 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하는 리더십이 주류질서로 편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존재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세대가 주류질서로 편입하기를, 공정한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수십 년 선배들이 이루지 못했던 ‘분단체제’를 혁파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6.3 지방선거가 그 변화의 트리거, 촉매제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필자 주요이력
- 前 정치컨설턴트
- 前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 1회 선거아카데미 교수
- 現 정치평론가
- 現 경제민주화 네트워크 자문위원
- 現 최요한콘텐츠제작소 소장
저서 : 유권자를 사로잡는 현장정치 오마이선거 오마이전략(매일컴 刊,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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