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반도체 호황이 만든 재정 여력, AI에 투자하자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반도체 호황을 근거로 향후 2년간 ‘역대급 초과 세수’ 가능성을 언급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산업 이익 확대가 법인세, 고소득 인력의 소득세, 무역흑자 증가로 이어지며 재정 여력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동시에 그는 기존 세입 추계 방식이 산업 사이클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며 보다 유연한 재정 운용을 주문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세수 증가가 아니다. 늘어날 수 있는 재정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초과 세수는 언제나 정치적 유혹을 동반한다. 단기 경기 부양, 현금성 지원, 지역 사업 확대 등 다양한 요구가 동시에 분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도체 호황이 만들어낸 재정 여력은 구조적으로 지속되는 재원이 아니라 산업 사이클에 따른 변동성이 큰 ‘일시적 수입’의 성격이 강하다.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하는 이유다.

김용범 정책실장 사진연합뉴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 [사진=연합뉴스]


과거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21~2022년 반도체 호황기에도 초과 세수가 발생했지만 재정은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이후 업황이 꺾이자 곧바로 세수 부족으로 이어졌다. 세입과 예산이 실제 산업 사이클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는 구조적 문제는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결과 역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번 재정 여력은 단순한 지출 확대의 근거가 아니라 경제 구조를 전환할 기회로 봐야 한다. 특히 반도체 호황이 인공지능(AI) 수요 확대와 깊이 연결돼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과실은 다시 미래 산업으로 환원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소비성 지출로 흘려보내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 크다.


지금 세계 경제의 중심은 빠르게 AI로 이동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자율주행, 로봇 산업까지 모두 고성능 반도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번 반도체 호황 역시 단순한 경기 반등이 아니라 AI 확산 과정에서 나타난 구조적 변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분명한 방향이 도출된다.


AI 수요가 만든 반도체 호황의 과실은 다시 AI와 미래 산업에 투자해야 한다.


우선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시급하다. AI 산업은 막대한 전력과 연산 자원을 요구한다. 글로벌 경쟁은 이미 데이터센터 구축 능력과 전력 공급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송전망, 전력 안정성, 냉각 기술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인프라 투자 없이는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둘째, 인재와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 투자가 필요하다. 반도체와 AI는 기술 격차가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분야다.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려운 만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재원이 요구된다. 일시적으로 확보된 재정 여력을 미래 기술 축적에 투입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다.


셋째, 산업 생태계 확장이 중요하다. 현재 구조는 대기업 중심의 생산 체계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소프트웨어, 설계, 장비, 데이터 산업까지 연결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재정은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마중물로 활용돼야 한다. 직접 개입보다 기반을 구축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물론 확장 재정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재정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방향이 문제다. 단기 소비를 자극하는 방식의 확장 재정은 일시적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 중심의 재정은 성장 잠재력을 높이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변동성이다. 반도체 산업은 본질적으로 사이클 산업이다. 지금의 호황이 영구적으로 지속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초과 세수를 구조적 재원으로 착각해 고정 지출을 늘리는 방식은 재정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 일부는 미래 투자에 쓰되, 일부는 재정 안정성을 위한 완충 장치로 남겨두는 균형이 필요하다.


김용범 실장이 강조한 ‘유연한 재정’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연성은 단순히 지출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춰 재정의 방향과 구조를 재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평균에 기반한 기계적 예산 편성에서 벗어나, 기술 변화와 산업 흐름을 반영한 전략적 재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늘어날 수 있는 재정을 현재의 소비로 쓸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경쟁력으로 전환할 것인가. 단기적 만족과 장기적 성장 사이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반도체 호황은 한국 경제에 드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기회를 일시적 소비로 소진한다면 다시 잡기 어려울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반도체 호황이 만든 재정 여력을 AI와 미래 산업에 투자하는 것,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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