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이란전쟁 이야기 | 진리·정의·자유] 이란 전쟁의 본질

  • -종교와 민족의 상처를 넘어, 공존의 질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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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중동 전쟁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순화다. 지금의 이란 전쟁은 겉으로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군사·외교 개입, 걸프 국가들의 이해관계, 후티와 헤즈볼라 같은 친이란 세력의 가세,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과 국제 에너지 질서를 둘러싼 압박이 한꺼번에 얽힌 다층 전쟁이다.
 
최근 보도만 보아도 걸프 국가들은 휴전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란의 군사 역량 약화가 필요하다고 미국에 요구했고, 예멘 후티는 이번 전쟁 국면에서 이스라엘 공격을 공식화했다. 이것은 더 이상 두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다. 중동 전체의 균열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전쟁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미사일과 공습, 원유와 환율의 문제로만 보면 절반만 보는 셈이다. 그 밑바닥에는 역사와 종교, 민족과 기억의 지층이 겹겹이 깔려 있다. 시아파의 맹주를 자임하는 이란과 수니파 주류 질서 사이의 오랜 경쟁, 유대 국가 이스라엘의 안보 논리와 이슬람권의 반발, 서방의 역사적 개입과 제국의 기억이 오늘의 폭발성을 키워 왔다.
 
수니-시아 분열은 단순한 교리 차이를 넘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세계의 지도권을 놓고 겨루는 정치적 축으로도 기능해 왔다. 종교는 깃발이지만, 그 깃발을 들고 움직이는 것은 권력과 공포, 기억과 동원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그러한 역사적 그림자를 오늘까지 남기고 있다. 십자군은 서유럽 기독교 세력이 성지 회복과 이슬람 세력 견제를 내세워 벌인 군사 원정이었다. 물론 오늘의 중동 전쟁을 십자군의 단순 반복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그 사이 민족국가가 형성됐고, 석유와 핵, 국제법과 글로벌 금융이 생겼다.
 
그럼에도 “신의 이름 아래 싸우는 정치”라는 오래된 형식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신앙이 스스로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신앙을 절대화할 때 종교는 가장 강력한 동원 언어가 된다. 중동의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되풀이돼 왔다.
 
이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아브라함을 공통의 믿음의 조상으로 존중하는 아브라함계 종교들이다. 다시 말해, 오늘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이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들이다. 같은 근원을 공유하면서도 서로를 배제하고 부정하는 현실은 인류 보편의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뼈아픈 모순이다. 믿음이 인간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갈라놓는 도구가 되는 순간, 신앙은 그 본래 의미를 잃고 권력의 언어로 타락한다.
 
이 모순은 중동이라는 공간, 그중에서도 이란이라는 나라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오늘의 이란은 시아파 이슬람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 역사적 뿌리는 훨씬 깊다. 고대 페르시아의 땅이었던 이곳은 조로아스터교의 중심지였고, 조로아스터교는 후대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사상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널리 평가된다.
 
게다가 이란은 중동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랍어가 아니라 페르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쓰는 독특한 나라다. 종교와 민족, 언어가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 속에서 갈등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나 자원 경쟁을 넘어 정체성의 충돌로 비화한다. 이란 전쟁은 “누가 더 강한가”의 전쟁인 동시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충돌하는 전쟁이기도 하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균열도 본질적으로는 신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7세기 이슬람 공동체의 계승 문제에서 시작된 분열은 시간이 흐르며 국가 동맹과 군사 네트워크, 정체성 정치의 토대로 굳어졌다. 이란은 시아파 네트워크를 통해 레바논, 이라크, 예멘 등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왔고, 수니파 주류 국가들은 이를 자국 안보와 지역 패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걸프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완전히 뜻을 같이하지 않으면서도 이란의 역량이 약화되기를 바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전쟁이 종교를 입고 있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세력균형의 정치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종교의 문제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정치 지도자들의 야욕과 편협은 언제나 집단의 기억과 상처를 이용한다. 종교는 본래 인간을 절제하게 해야 하지만 권력과 결합하면 오히려 절대화의 도구가 되기 쉽다. “신의 뜻”, “선민의 사명”, “역사의 복수” 같은 말은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원 구호다. 그 순간 상대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 제거 대상으로 바뀌고, 전쟁은 국경 다툼이 아니라 존재론적 전쟁으로 변한다. 지금 중동이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대를 잘못된 정책의 주체가 아니라 아예 악의 본체로 규정하는 순간, 평화는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배신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란 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군사적 휴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휴전은 총성을 멈출 뿐 적개심의 서사를 멈추지 못한다. 진정한 종식은 세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접근해야 한다.
 
첫째는 국가안보다. 해협 봉쇄, 미사일 공격, 대리세력 전개를 중단시키는 실질적 안전보장 장치가 있어야 한다. 둘째는 정치다. 이란과 걸프 국가들, 이스라엘과 주변국, 미국과 유럽이 얽힌 다층 협상 구조를 다시 짜야 한다. 셋째는 문명과 종교의 층위다. 상대를 멸절의 대상으로 보는 사고를 해체하지 않으면 전쟁은 형태만 바꿔 되돌아온다. 중동의 진짜 문제는 무기보다 기억이 오래 간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기억을 다루는 철학과 종교의 언어가 다시 등장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한국의 경험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대한민국은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적 전통, 민간 신앙이 한 사회 안에서 공존해 온 드문 나라다. 한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종교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며, 관련 연구들도 한국 사회가 종교 자유와 타종교와의 공존에 대해 비교적 높은 지지를 보인다고 분석한다. 물론 갈등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가 특정 종교를 절대화하지 않고, 여러 종교가 제도 안에서 경쟁하면서도 공존하는 경험을 축적해 온 것은 분명한 자산이다.
 
이 한국적 자산의 더 깊은 뿌리로 흔히 홍익인간 정신과 제세이화의 이상이 거론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조화롭게 다스린다는 이 오래된 원리는 특정 종교의 우월을 선언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를 함께 살리는 윤리의 문장에 가깝다. 하늘을 우러르되 자연을 해치지 않고, 공동체를 중시하되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종교 공존의 토양이 될 수 있다. 이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누구도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짓밟을 수 없고, 국가도 문명도 인간의 존엄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간 타협의 기술이 아니라, 문명이 지켜야 할 최후의 원칙이다.
 
여기서 다석 유영모의 사상도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다석은 특정 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기보다, 서로 다른 전통 안에서 인간 내면의 양심과 생명, 그리고 하늘의 뜻을 찾으려 했다.
 
오늘 중동이 잃어버린 것도 바로 이것이다. 믿음은 달라도 인간의 고통은 같다는 감각, 신의 이름은 달라도 살려야 할 생명은 같다는 감각 말이다. 갈등을 끝내는 힘은 상대를 완전히 같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다름을 인정한 상태에서 공통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과 코란과 유대 경전의 말씀을 함께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Blessed are the peacemakers”, 곧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한다. 평화의 실천이야말로 믿음의 진짜 표지라는 뜻이다.
 
코란은 “so that you may know one another”, 곧 “서로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다. 다름은 지배와 멸절을 위한 이유가 아니라, 상호 인식과 존중의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유대 경전 시편은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곧 “형제가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한다. 서로 다른 경전에서 나온 이 짧은 말씀들은 결국 하나의 진실로 수렴한다. 신은 인간에게 증오를 신성화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서로를 알고, 함께 살고, 평화를 이루라고 요청했다.
 
그러므로 이란 전쟁의 본질은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총과 미사일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기억과 신앙, 민족과 권력의 전쟁이다.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오래 간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법도 다층적이어야 한다. 군사적 억지와 외교적 타협, 경제적 이해와 종교적 성찰, 국가안보와 인간존엄이 함께 가야 한다. 어느 하나만 앞세우면 다시 무너진다. 중동의 역사는 너무 오래 “승리한 자의 평화”를 시도해 왔다. 이제는 “함께 살아야 하는 자들의 평화”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한국이 이 비극을 보며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도 분명하다. 우리는 정말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다운 지혜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홍익인간을 교과서 문구가 아니라 세계적 윤리로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다석이 묻던 것처럼 서로 다른 믿음 속에서 하나의 진실을 찾아낼 정신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함께 가야 한다는 오래된 직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곧 인간 안에 하늘과 자연의 뜻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인식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가.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대를 끝내려면, 이제 인류는 “다름의 정치”를 넘어 “같음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민족은 다르지만 고통은 같고, 종교는 다르지만 생명은 같으며, 국가는 달라도 인간의 존엄은 나눌 수 없다. 우리가 인간 속에 하늘과 자연의 뜻이 함께 살아 있다고 믿을 때, 곧 인간이 자연과 분리된 지배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존재라고 자각할 때, 비로소 절제와 공존과 평화는 가능해진다.
 
전쟁은 끝내 땅을 차지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증오의 대물림을 끊는 자의 손에서 끝난다. 진리와 정의와 자유는 어느 한 진영의 깃발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최후의 울타리다.
 
이란 전쟁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를 핑계로, 민족을 핑계로, 국가를 핑계로 인간을 버리는 정치가 더 이상 승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문명이 해야 할 일이며, 대한민국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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