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 컬럼]AI 시대의 기업가정신 — 최태원과 젠슨 황이 만나는 이유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엔비디아의 연례 기술 콘퍼런스 GTC는 더 이상 단순한 IT 행사가 아니다. 겉으로는 개발자와 기업들이 최신 기술을 소개하는 자리지만, 실제로는 AI 산업의 방향을 가늠하는 전략 무대에 가깝다. 세계 반도체 기업과 빅테크의 최고경영자들이 이곳에 모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을 전시하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산업의 판을 다시 그리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올해 행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엔비디아 젠슨 황 CEO의 재회다. 두 사람은 한 달 전 미국에서 이른바 ‘치맥 회동’을 하며 화제가 됐다. 그리고 다시 GTC에서 만난다. 겉으로 보면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급 협력과 차세대 AI 반도체 논의가 주요 의제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가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만남은 단순한 비즈니스 협상을 넘어선다.


AI 시대 산업 구조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한국식 호프집 99치킨에서 가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만찬회동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신간 슈퍼모멘텀을 펼쳐보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한국식 호프집 '99치킨'에서 가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만찬회동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신간 '슈퍼모멘텀'을 펼쳐보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AI 산업은 흔히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경쟁으로 설명된다.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뛰어난 AI 모델을 만든 기업이 승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산업 현장을 들여다보면 권력의 중심은 조금 다른 곳에 있다. AI를 움직이는 핵심 요소는 세 가지다. 연산 능력, 메모리, 그리고 전력과 인프라다.


AI 모델은 단순한 계산 능력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막대한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처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 반도체 구조를 넘어서는 새로운 메모리 기술이 필요하다. 여기에 막대한 전력과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뒤따른다. 결국 AI 산업은 소프트웨어 경쟁이라기보다 초대형 인프라 산업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구조 변화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 바로 엔비디아다. 젠슨 황의 기업가정신은 전통적인 반도체 CEO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는 단순히 칩을 만드는 경영자가 아니라 플랫폼을 설계하는 기업가에 가깝다.


엔비디아가 AI 시대의 중심에 올라선 이유는 GPU 성능 때문만이 아니다. CUDA라는 개발 플랫폼을 구축해 연구자와 기업들이 그 위에서 기술을 개발하도록 생태계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하나를 파는 기업이 아니라 산업의 기준을 만드는 기업이 된 셈이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전략의 본질은 경쟁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젠슨 황은 바로 그 규칙을 바꾼 기업가다. 그래서 AI 산업에서 중요한 질문은 더 이상 “누가 더 빠른 칩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다. 누가 AI의 기준과 생태계를 설계했는가다.


그러나 플랫폼 기업도 혼자서는 산업을 움직일 수 없다. AI는 결국 인프라 위에서 돌아가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태원 회장의 전략이 등장한다.


최 회장은 최근 SK그룹의 사업 구조를 AI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반도체의 SK하이닉스, 통신과 데이터센터의 SK텔레콤, 에너지와 인프라의 SK이노베이션이 그 축이다. 각각의 사업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AI 인프라라는 하나의 산업 구조 안에서 연결되는 전략이다.


특히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HBM 기술은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HBM은 일반 메모리와 다르다. 단순히 용량이 큰 메모리가 아니라 GPU 위에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초고속 데이터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AI 전용 메모리다.


AI 모델이 커질수록 GPU 성능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이 메모리 속도다. 그래서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온다.


“AI 시대의 진짜 금광은 GPU가 아니라 메모리일지도 모른다.”

그래픽노트북LM
[그래픽=노트북LM]


최태원과 젠슨 황의 만남이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기업가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AI 산업의 핵심 축을 쥐고 있다. 하나는 연산 플랫폼, 다른 하나는 메모리 인프라다.


이 두 축이 결합하면 산업의 구조 자체가 달라진다. 과거 IT 산업에서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AI 산업에서는 연산 능력, 메모리, 전력, 데이터센터가 동시에 결합해야 한다. 결국 AI 산업의 경쟁력은 단일 기술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 변화는 산업 혁명의 역사에서도 반복돼 왔다. 철도의 시대에는 철도망과 철강 산업이 함께 성장했고, 자동차의 시대에는 자동차 기업과 석유 산업이 동시에 발전했다. 기술 하나만으로 산업 혁명이 완성된 적은 없었다. 언제나 플랫폼과 인프라의 결합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AI 시대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GPU와 메모리, 데이터센터와 전력이 결합해 새로운 산업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질서의 중심에서 플랫폼 기업과 인프라 기업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경제의 위치가 드러난다. 한국은 AI 플랫폼 분야에서는 미국보다 뒤에 있다. 그러나 AI 인프라에서는 세계 최상위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HBM 메모리, 배터리, 전력 설비, 데이터센터 운영 기술까지 AI 산업을 움직이는 실물 기반 기술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경제가 축적해 온 제조 기술과 산업 인프라의 결과다. AI 시대에 한국이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가정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젠슨 황은 GPU 하나에서 출발해 AI 플랫폼을 설계했다. 최태원은 메모리 기업을 기반으로 AI 인프라 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두 사람의 길은 서로 다르지만 질문은 같다.


AI 시대의 산업 구조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GTC에서 두 기업가가 다시 만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시대의 승부는 더 빠른 칩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산업의 판을 그리는 능력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바로 그 새로운 산업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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