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 작가]
연말이 다가오며 어느덧 남도에도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 한낮에도 바람이 차게 느껴지면서 근로자들도 햇볕이 드는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광주 현장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곳이지만 골바람도 세게 불어 잠시 쉴 때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곳을 찾게 된다. 점심시간 이후 휴식시간에 산 쪽의 언덕 작은 공원을 찾았다. 안전모를 벗어 옆에 내려놓고 벤치에 기대 앉아 눈을 감았다. 먼지투성이 작업복의 내 모습은 흡사 홈리스처럼 보이겠지만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덮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내 모습은 홈리스가 아니라 디오게네스처럼 보이지 않을까.’
외모는 작업복에 헝클어진 머리, 어디든 몸을 뉠 수 있는 곳이면 아무데나 누워 잠을 청하는 일용직 노동자이지만 배고프지 않고 햇살이 비치는 따뜻한 곳에 앉아 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있다면, ‘자족’과 ‘자연에 따른 삶’을 중시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견줄 만하지 않을까. 그는 행복이 부나 지위가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만으로 살 수 있는 내적 자유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사회가 만든 법, 관습, 체면 같은 인위적인 규범보다, 자연과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쓸데없는 욕망과 허영을 끊어낼 것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살기 위해 산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인간의 삶을 경제활동과 생존의 문제로 압축하는 이 표현 속에선, 해나 아렌트가 말한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건설노동자는 도시의 뼈대를 세우는 일을 해왔지만, 공적 공간에서는 자주 ‘하층 노동력’, ‘노가다’”라는 말로 불려 왔다. 건설노동자가 사회 구성의 가장 기초단위를 담당해 왔음에도, 이들의 얼굴과 이름, 생각과 감정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노동으로 도시가 완성될 뿐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듯, 우리의 몸은 단지 구조에 의해 찍혀 나오는 수동적인 표면이 아니다. 몸은 세계를 지각하고, 도구와 공간을 익히고, 타인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고유한 감각과 “스타일”을 만들어 낸다. 아침마다 무거운 자재를 나르며 균형을 잡는 다리, 한눈에 위험을 감지하는 눈, 동료의 몸짓을 읽고 즉흥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손짓은, 현장의 노동자가 이미 매우 복잡한 판단과 협력의 능력을 몸으로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의 지혜는 “기술자”나 “전문가”의 언어로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하고 필요할 때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되어 왔다. 최근 건설현장의 안전사고가 빈번해지면서 사회적 관심을 갖게 되긴 했지만 안전사고의 당사자인 근로자들을 혁신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늘 그래왔듯이 이들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래서 현장 안전을 높이기 위한 각종 법과 규제 그리고 교육이 많아질수록 힘들어지고 피곤해지는 것은 현장 노동자다.
과거 학교에서 써오라던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의 직업을 '노가다'라고 차마 적지 못해 고민하는 어린이가 그 시절을 표현하는 드라마에 숱하게 나온다. '건설노동'이란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의미였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남자', 거칠고 무식해 몸을 쓰는 것밖에는 돈을 벌 방법이 없는 사람, 늘 술에 취해 있거나 담배만 뻑뻑 피우는 아저씨.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정 힘들면 노가다라도 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정 힘들면 공무원이나 하라"든가 "정 힘들면 증권회사에 들어가든가"라고는 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는 건설노동을 누구나 할 수 있고, 잠시 하는 일이고, 별것 아닌 일이며, 실력 있는 사람은 하지 않을 일이고, 뜨내기의 일이라고 취급하고 있다.
건설노동을 꾸준히 일하면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자부심을 갖고 일하며, 힘들게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노가다'를 천시하고 괄시한다. 건설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그런 의미다.
어느 날, 현장에서 관리자와 다툼이 벌어졌다. 벽면 처리가 불량하다는 지적이었다. 나는 시멘트 가루에 접착제를 섞어 물에 갠 고스리를 바르고 있었고, 그 위에 다음 공정이 올라갈 예정이었다. 관리자는 표면이 매끄럽지 않다며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해놨냐”고 했다. 그는 고스리가 어떤 재료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결과만 보고 있었다.
그때 느꼈다. 이 다툼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라는 것을. 건설 현장에는 지금도 외래어와 은어가 널려 있다. ‘히사시’, ‘시마이’, ‘오도리바’ 같은 일본식 전문용어가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오간다. 때로는 관리자도, 설계자도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실수나 하자가 생기면, 그 모호한 말을 기준으로 노동자의 일을 “불량”이라고 단정한다.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평가권을 쥐고, 그 언어 안에서만 책임과 능력이 나뉜다.
부르디외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언어자본의 문제다. 언어자본이란 단지 말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역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설명하고 방어할 수 있는 힘이다. 한국 건설노동자들이 일본에서 들어온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흉내 내듯 쓰는 현실은, 기술언어에 대한 자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남이 만들어 놓은 말을 빌려 쓰면서도, 그 말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장악하지 못한 채 따라가는 것이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말과 겹쳐 보면, 문제는 더 선명해진다. 노동자가 쓰는 언어가 자신의 몸, 기술, 삶의 경험과 제대로 연결되지 못할 때, 그는 자기 존재를 머물게 할 집을 가지지 못한다. 고스리의 의미도 모르는 언어 공간에서, 노동자의 손과 기술은 이름을 잃는다. 기술은 있지만, 그 기술을 설명할 언어가 없고, 그 언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권위도 없다. 이는 단지 소통의 불편이 아니라, “존재의 집”이 타인의 언어로 지어져 있고, 노동자가 그 집의 세입자로만 살아가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외래어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언어가 노동자의 몸과 경험, 직업적 자각과 만나지 못한 채, 위에서 내려온 말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 노동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해석하고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다. 기술과 경험은 모두 자기 몸에 있는데, 그걸 말로 묶어 줄 언어가 없으니, 타인의 기준과 언어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이 상태가 곧 부정적 아비투스, 즉 “나는 원래 여기까지”라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습성이 된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했다. 랑그가 사회가 공유하는 규칙과 체계라면, 파롤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실제로 입을 열어 말하는 행위다. 건설노동자를 둘러싼 사회적 통념과 언론 보도, 정책 문서는 “위험하지만 값싼, 대체 가능한 노동력”이라는 이미지를 하나의 랑그로 굳혀 왔다. 여기에 맞서, 현장의 노동자가 자신의 몸으로 겪은 피로와 두려움, 동료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말은 파롤이자, 기존 랑그를 비트는 작은 균열이 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안전교육 몇 시간, 캠페인 몇 번이 아니라, 노동자의 언어를 되찾는 일이다. 현장에서 실제 쓰는 용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몸의 경험과 연결해 설명하며, 외래어든 한국어든 “우리가 이해하고 선택한 언어”로 재구성해야 한다. 고스리의 의미를 알고, 그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고스리를 둘러싼 평가에도 참여할 수 있다. 이는 곧 언어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이자, “존재의 집”을 남의 말이 아닌 자기 말로 다시 짓는 작업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그 가운데 행위란, 타인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함께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을 뜻한다. ‘먹기 위해 산다’는 인식은 우리의 삶을 노동의 차원에만 가두어 버린다. 그러나 건설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고, 안전과 존엄에 대해 말하고,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사유하기 시작할 때, 그 삶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노동’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낮에는 먼지 묻은 작업복을 입고 공사장 비계 위를 오르내리며, 밤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은, 그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이다. “나는 구조가 찍어낸 노동자인가, 아니면 나만의 말과 실천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주체인가.” 부르디외의 언어로 말하면, 그는 건설노동자의 아비투스를 몸으로 살면서도, 동시에 그 아비투스를 관찰하고 언어화하는 이중의 위치에 서 있다. 논문을 쓰고, 칼럼을 기고하고, 동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행위는 단지 학문적 작업을 넘어, 건설노동자의 삶을 행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파롤이 되는 것이다.
도시의 건물은 도면과 자본만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공사장 한가운데, 따뜻한 햇볕을 찾아 앉은 노동자의 몸, 휴대전화로 집에 남은 가족에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 동료의 안전을 챙기기 위해 소리치는 외침의 한마디가 그 도시의 보이지 않는 골조를 이룬다. 건설노동자는 이 도시의 기초를 쌓는 사람일 뿐 아니라, 자기 몸과 말로 삶의 의미와 존엄을 함께 지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이 작은 행위들, 이 파롤에 귀를 기울이고, 공적인 자리에서 그 목소리가 더 자주, 더 분명하게 들리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다.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아비투스를 넘어서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일과 맞닿아 있다. 언어를 되찾은 노동자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기 말로 표현할 때, 그 말은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라, 도시와 사회를 더 안전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행위가 된다. 그 길 위에서, 건설현장은 더 이상 누군가를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파트너로 인정하며 함께 세계를 세우는 장이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idoosoo@naver.com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빈곤지역 교육지원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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