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드론 수십 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인 폴란드 영공을 침범해 폴란드가 이를 격추했다. 나토 전투기가 동맹국 영공에서 적대 목표물을 격추한 것은 1949년 창설 이후 처음이다. 폴란드가 이번 사건을 의도적 도발로 규정하고 나토의 집단 방위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 전역으로 확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BBC 등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향해 발사한 415대 드론 가운데 최소 8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어섰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폴란드 영공이 19차례 침범당했고 이 중 3대가 격추됐다”고 밝혔다. 폴란드 F-16 전투기 외에도 네덜란드 F-35, 이탈리아 조기경보통제기(AWACS), 독일 패트리엇 방공시스템이 대응에 투입됐다.
폴란드 영공 침범은 지난주에도 두 차례 있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드론이 동시에 넘어온 사례는 없었다. NYT는 나토 전투기가 동맹국 영공에서 적대 목표물과 교전한 것은 창설 이후 처음이라고 전했다.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으나, 격추된 드론 잔해가 민가에 떨어지면서 큰 충격을 안겼고 수도 바르샤바 공항이 일시 폐쇄되기도 했다.
폴란드 정부는 즉각 나토 조약 제4조 발동을 요청했다. 제4조는 영토 보존이나 안보가 위협받을 경우 회원국이 긴급 협의를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한 조항이다. 나토는 폴란드 요청에 따라 이날 북대서양이사회를 열어 관련 사안을 논의했다. 제4조가 발동된 것은 이번까지 7차례이며, 가장 최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직후인 2022년 2월이었다.
폴란드가 실제 군사적 대응을 의미하는 제5조 발동까지 추진할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폴란드는 우선 4조를 발동해 동맹국들과 위협 성격을 규명하고 공동 대응책을 모색하기로 했다. 투스크 총리는 이번 사건을 “대규모 도발”이라고 규정하며 “상황은 심각하며, 우리가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벨라루스와 러시아는 우발적 사고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벨라루스 파벨 무라베이코 참모총장은 “전자전 장비로 인해 드론이 항로를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방부도 폴란드 내 목표물을 타격할 “계획이 없었다”고 밝혔다. 폴란드 검찰은 지금까지 회수된 9대가 모두 방공망 교란용 ‘게르베라(Gerbera)’ 드론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 각국은 이를 단순한 사고로 보지 않고 있다.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이렇게 많은 드론이 폴란드 영토를 우발적으로 비행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했다. 구이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도 이번 사건을 “도발과 시험”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닌 “고의적인 공격”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며 “이것은 전적으로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나토 영토의 한 치라도 방어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나토-러시아 직접 충돌로 비화할 위험을 높였다고 진단했다. 키어 자일스 영국 채텀하우스 선임연구원은 BBC에 “러시아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는 유럽과 나토에 시험대”라며 “러시아는 유럽의 결의, 특히 폴란드가 이런 종류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
나토의 방공 체계 허점도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슬로바키아의 페테르 바토르 전 나토 대사는 “나토는 드론이 영공을 침범한 뒤에야 대응했다”며 “이는 나토의 최우선 목표인 억지력 실패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요격이 가능하도록 나토가 협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국 싱크탱크 국제문제전략연구소(IISS) 미사일·드론 전문가인 파비안 힌츠 연구원도 “나토의 전통적인 방공시스템은 미사일과 유인 전투기를 방어하도록 설계됐다”며 이번 사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규모 저가 드론 공격에 나토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영국 일간 더타임스에 따르면 데니스 슈미할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전날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향후 10년 안에 러시아의 침략 의도가 있음을 드러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나토를 상대로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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