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39) 제국이 머물다 간 '달랏' .. 고산의 숨결이 살아있는 '사파'

  • 올 여름 한국 관광객 유혹하는 베트남의 두 고원 도시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여행 포털 ‘여기어때’가 한국인이 2025년에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로 일본, 유럽 다음으로 베트남을 꼽았다고 한다. 개별 국가로 한다면 베트남이 2위에 오른 셈이다. 베트남이 그다지 멀지 않고 ‘가성비’ 높은 여행지이기에 여전히 인기 있는 것 같다. 올여름 휴가 때도 많은 이들이 베트남으로 향할 모양이다. 많은 이가 다녀온 다낭을 벗어나 이제는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작년 10월 초 랭키파이의 베트남 선호 여행지 트렌드 지수에서 하노이, 달랏, 하롱베이, 사파가 1위부터 4위까지 차지했다. 여기에서 하노이와 하롱베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니 달랏과 사파로 향해 보는 것도 좋겠다. 더위를 피해 바다로 풍덩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으나 바람이 불어오는 산으로 향해 볼 만하다. 얼마 전 안전사고로 여행객들이 희생되기도 해 안전에 한껏 유의하면서 말이다.
베트남이 늘 더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남부와 중부는 늘 덥다. 북부는 살짝 4계절이 있고 겨울이 우리 가을 같은데 그곳도 긴 기간 동안 덥다. 여름 한낮에 40도를 넘는 때도 종종 있다. 베트남에 더운 곳이 많다 보니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면서 더위를 피할 지역을 찾는 것도 필요했다. 베트남은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까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식민지 시기에 피서지로 개발된 대표적 휴양지가 바로 남부의 달랏과 북부의 사파다.
 
 
달랏 시내 전경 사진저자 제공
달랏 시내 전경 [사진=저자 제공]


 서늘한 휴양지, 봄의 도시 달랏
 
달랏은 베트남 서남쪽 해발 1500m 럼동성의 럼비엔 고원 지대에 있다. 식민정부는 서부 고원지대를 장악하기 위해 탐사대를 보내곤 했다. 이곳이 휴양지로 된 것은 1890년대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이 지역을 탐사하고 당시 식민정부 총독 폴 두메르가 개발하면서부터다. 예르생이 달랏을 탐사한 1893년을 달랏 탄생의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그는 페스트균을 발견한 의사로 유명하다. 프랑스는 1858년부터 베트남을 침략해 일부 지역을 빼앗기 시작했고 1883년 전국을 지배하게 됐다. 1887년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했고 이후 라오스를 이에 편입했다. 1941년부터는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이중 지배하게 됐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민(월맹) 세력이 19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려고 획책해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양자 간에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 중에 프랑스는 바오다이(Bao Dai) 황제를 내세워 1949년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4년 7월 제네바협정으로 프랑스가 완전히 물러가고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북부, ‘베트남국’은 남부를 통치하게 됐다.
달랏은 이러한 베트남 근현대사를 품고 식민지 휴양도시로서 발전해갔다. 1919년에 쑤언흐엉(Xuan Huong) 호수가 조성됐다. 달랏 시내 중심에 위치한 쑤언흐엉은 춘향(春香)이란 뜻이다. 발전소를 세우기 위해 댐을 만들며 작은 웅덩이였던 곳이 호수로 됐다. 식민정부는 이를 통해 전기와 상수를 공급했다. 1922년에는 그랜드 호텔, 즉 현재의 달랏 팰리스 호텔이 문을 열었다. 1938년에는 달랏 기차역이 완공됐다. 지금은 기차가 달랏역에서 출발해 짜이맛까지 관광용으로 운행되고 있는데, 식민지 시기에 이 철로가 판랑-탑짬까지 이어졌고 거기서 남으로 사이공, 북으로 냐짱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이 유산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 됐다.

 
달랏 기차역 사진저자 제공
달랏 기차역 [사진=저자 제공]

달랏 대성당은 1942년에 완성됐다. 고딕 양식에 표면을 분홍색으로 칠해 호찌민시 떤딘 성당과 다낭 대성당에 견줄 만하다. 달랏 대성당도 다낭 대성당처럼 첨탑 위에 닭 조형물을 얹어 놓았다. 도멘 드 마리 성당도 유서 깊은 성당이다. 이 성당은 1930년 완공되었다가 1943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지붕은 베트남 서부 산간지대 주택 모양을 본떴고 벽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다고 한다. 수녀원 성당으로 기능하고 있다.
1930년대에는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여름 궁전이 세워졌다. 궁전이라고 하지만 근대식 건축 형식을 따랐다. 현재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제3 별궁이다. 제1 별궁은 1년여 전에 문을 닫아 아직 열지 않았고, 제2 별궁 구역은 게스트하우스로 쓰이고 있다. 그의 부인 남프엉(Nam Phuong) 황후의 별장도 달랏에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남프엉은 근현대사의 풍랑 속에서 품위를 지켰기에 지금도 베트남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바오다이는 비운의 황제였다. 그는 프랑스 식민 지배하에서 국내 통치를 담당하다가 1945년 3월에 일본이 직접 통치하면서 세운 ‘베트남제국’의 국가수반으로 동원됐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시기인 1949년에 프랑스는 바오다이를 앞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했다. 1954년 남북으로 분단된 후 바로 다음 해 10월에 바오다이 정부에서 총리였던 응오딘지엠이 주도하여 ‘베트남국’을 ‘베트남공화국’으로 전환하면서 바오다이는 폐위되고 말았다.
남북 분단 시기에 달랏은 교육 도시이자 남부 문화의 산실이기도 했다. 카페 뚱(Cafe Tung)은 지금도 1960년대, 1970년대 다방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남부의 유명한 대중가요 작곡가 찐꽁선도 달랏 지역에서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곡을 주로 불렀던 카인리를 만났다. 그들은 사이공(현 호찌민시)으로 옮겨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영화 <나와 찐>(Em va Trinh)은 찐꽁선과 카인리가 카페 뚱에서 만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196070년대 다방 분위기의 까페 뚱 사진저자 제공
1960~70년대 다방 분위기의 까페 뚱 [사진=저자 제공]


달랏 시내를 한눈에 보려면 로빈 힐에 올라 시내를 눈에 담고 케이블카를 타고 발밑으로 펼쳐진 소나무 숲을 보는 것도 좋다. 케이블카는 쭉럼(Truc Lam·죽림) 불교 선원 부근에 도착하게 된다. 쭉럼 선원은 선원이라는 명칭 그대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 수행하기에 알맞은 분위기를 지녔다. 그 경내에선 발걸음도 조심스레 디뎌야 할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는다면 리엔크엉 공항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쭉럼 선원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녔다면 린프억(Linh Phuoc) 불교사원은 화려한 장식을 가득 담았다. 도자기 파편으로 사원 건물과 용을 장식했고, 거대한 종과 불상, 아름다운 조형물로 사원을 가득 채웠다. 여기에 더해 노란 국화꽃으로 장식한 관세음보살상은 바람에 꽃을 날리며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본래 달랏 지역은 소수종족의 땅이었다. 코호족, 마족, 므농족 등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달랏 시내만 가면 이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평지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와 그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만들었다.

 
린프억 불교사원의 관세음 보살상 사진저자 제공
린프억 불교사원의 관세음 보살상 [사진=저자 제공]
 
 
소수종족 문화와 인도차이나 최고봉을 품은 사파
 
사파는 1920년대 프랑스 식민지하에서 북부의 휴양도시로 개발됐다. 해발 1650m의 고지대다. 사파는 중국의 윈난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 북부 라오까이성에 속해 있다. 3143m 높이의 동남아 대륙부 최고봉인 판시판산을 곁에 두고 있다. 달랏과 달리 사파는 1~2월에 우리의 늦가을 또는 초겨울 같은 날씨로 춥다.
사파는 몽(Hmong)족의 땅이다. 자오족, 따이족 등도 함께 이 땅에 산다. 몽족은 흐몽이라고 잘못 불리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먀오족이라고 한다. 달랏과 달리 사파 시내에는 소수종족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사파 중심에 있는 석조 성당 앞 광장에는 소수종족 어린이들이 놀이를 하다가 물건을 팔기도 한다. 이 성당은 단순화한 유럽풍 고딕 양식으로 소박하게 지어졌다. 함롱산에 오르면 사파 시내와 호수 전경을 볼 수 있다. 소수종족 마을을 간단히 보려면 깟깟 마을을 다녀오면 된다. 어떤 이는 이곳이 테마파크처럼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파가 이제 너무 인공적이고 상업화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종족을 만나보지 못한 여행객에게는 이채롭게 보인다. 소수종족의 자연 마을을 보려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할 것이다. 다랑논 트레킹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먼 거리에 있는 리조트에서 ‘속세’를 잊고 며칠 지내다 오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페이스북(현 메타) CEO 마크 저커버그가 사파의 토파스 에코로지에서 쉬고 갔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시내에서 먼 거리에 있는 곳이다.

 
사파 성당과 소수종족 아이들 사진저자 제공
사파 성당과 소수종족 아이들 [사진=저자 제공]

동남아 대륙부 최고봉 판시판 정상에 오르려면 푸니쿨라 열차를 타고 케이블카를 타고 또 열차를 타고 가야 한다. 그런 후 계단을 오르면 3143m 정상에 이른다. 백두산이 2744m, 한라산이 1950m인 것과 비교된다. 케이블카를 타는 동안 아래에 펼쳐진 다랑논의 장관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산악지대 주민들은 산비탈을 깎고 축대를 쌓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여행객들에게야 그 풍경을 감상하며 즐기는 곳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살아가려는 고된 노동의 터다.

 
판시판 산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에서 본 다랑논 사진저자 제공
판시판 산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에서 본 다랑논 [사진=저자 제공]

한동안 유행했던 일요일 박하 시장의 ‘사랑 시장’ 이야기는 이제 전설로 남았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른 이와 결혼한 후 옛 연인을 잊지 못하자 ‘사랑 시장’에서 1년에 한 번 만날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다. 박하 시장은 사파에서 좀 떨어져 있는 가장 큰 소수종족 시장인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관광객을 끌기 위해 만든 신화인지 확인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자 이제 떠날 시간이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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