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48>우성리 – 2009년 해군관함식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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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1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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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중국은 2010년 미국과 함께 G2 반열에 올라서며 경제적 굴기로 세계를 놀라게 한 데 이어 2011년에는 군사적인 확장으로 주변국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2011년 초 스텔스전투기인 젠-20의 시험비행이 공개되면서 각국의 이목을 집중시킨 데 이어 2011년 8월에는 항공모함인 바랴그가 시험운항을 마쳤다.

홍콩의 월간지 ‘경보’(鏡報) 9월호는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인 ‘바랴그’호가 중국의 첫번째 핵추진 항공모함으로 개조될 것이며 이름은 ‘뤼순(旅順)’호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경보는 바랴그호를 핵 항모로 개조하기로 결정하기 전 중국이 항모 네 척 건조 계획을 승인했으며 이 중 두 척은 일반항모로 2014, 2015년에 차례로 진수될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의 항공모함 출현은 2009년부터 이미 예정돼 있었다. 인민해방군 해군 창설 60주년을 앞둔 2009년 4월 우성리(吳勝利) 해군 총사령관은 당시 관영언론인 신화사와의 인터뷰에서 “해군은 장거리 작전 능력을 위해 ‘대형수면전투함정’과 신형 스텔스잠수함, 고속어뢰정, 해군용 첨단미사일과 신예 전투기 등 차세대 함정 및 전투기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해군 군사력을 비약적으로 증강시키는 신호탄이었다.

우성리 사령관은 또 “해군항공대를 위한 전투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항공병 훈련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해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하는 대양함대 구축을 시사했다. 이 밖에도 우성리는 “중국 해군은 이밖에 미사일이 대거 배치된 해안기지의 방어능력을 강화하고 장교와 하사관을 더욱 많이 양성하며 해상훈련을 수시로 실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우성리 사령관의 언급 이후 2010년 10월에는 스텔스잠수함이 진수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선박중공업그룹(CSIC)이 최근 인민해방군 우한(武漢)조선소에서 건조된 신형 잠수함을 진수시켰으며 이 잠수함에 대해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의 첫 스텔스 잠수함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잠수함은 부상하지 않고 물 속에서 디젤엔진을 가동할 수 있는 공기불필요(AIP)시스템을 적용해 핵잠수함처럼 수중 작전 기간이 길 것으로 예상됐다.

우성리는 중국 해군의 전투력증강의 최선봉에 서있는 사람이다. 지난 2009년 사상 최대규모의 해상관함식을 성대하게 치러내며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의 신망도 높다. 해군에 입대해 해군에서 요직을 거쳐 해군 총사령관에 오른 인물인 그는 2012년 10월에 개최될 제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오를 유력한 인사로 꼽힌다.

◆역사적인 2009년 관함식의 영웅

“주석 동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열병해 주십시오.” 2009년 4월23일 오후2시 중국 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 연안에서 20여km 떨어진 앞바다. 우성리(吳勝利) 중국 해군사령관은 제3세대 구축함 스자좡(石家庄) 선상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궈보슝(郭伯雄) 군사위 부주석,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 천빙더(陣炳德)총참보장 등 중국 군부 지도부들을 대거 대동하고 스자좡호에 탑승해있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우성리의 외침에 “시작하라”고 크게 답했다. 30년간의 개혁개방으로 글로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이 ‘해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대양강국을 꿈꾸며 연 건국 이래 최대 해상 관함식은 이렇게 시작됐다.

관함식은 중국 해군에 대한 ‘분열식’과 외국 군함에 대한 ‘열병식’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분열식이 시작되자 중국이 처음 공개하는 잠수함 4척이 등장했다. 검푸른 바닷속에서 거대한 검은 물고기처럼 핵잠수함 창정(長征) 6호와 3호가 웅장한 모습을 반쯤 드러냈다. 이들은 각각 ‘샤(夏)급 092형’과 ‘한(漢)급 091형’으로 20년 이상 운행된 구형 핵잠수함이다. 최신형 핵잠수함 ‘진(晋)급 094형’은 전력 노출을 우려한 듯 공개되지 않았다. 이어 재래식 잠수함인 창청(長城) 218호와 177호도 모습을 드러냈다. 잠수함에 이어 중국 군함 25척이 차례로 스자좡함 앞을 지나갔다.

갑판에 부동자세로 도열한 흰 제복의 중국 해군 장병들은 후 주석을 향해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후 주석이 경례를 받은 후 이들을 향해 “안녕하십니까(你們好)”라고 외치자 장병들은 “주석님 안녕하십니까(首領好)“라고 답했다. 이어 후 주석은 “수고많으십니다(你們辛苦了)”라고 하자 장병들로부터 “인민을 위해 복무할 뿐입니다(爲人民服務)”라는 답변이 우렁차게 돌아왔다. 하늘에는 31대의 각종 전투기가 9개 편대로 나뉘어 하늘을 갈랐고 조명탄 72발을 발사해 욱일승천하는 중국 해군의 위상을 보여줬다. 이 과정은 중국 CCTV 뉴스를 통해 중국 전역에 대대적으로 방영됐다. 중국인들은 대규모의 관함식에서 자긍심을 느꼈고, 대규모 행사를 멋지게 치러내준 우성리 해군사령관을 믿음직스러워하고 있다.

◆사병입대 28년만에 장군반열

현재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자 해군총사령관인 우성리의 아버지는 우셴(吳憲, 1915-2001)으로 문화대혁명 이전에 저장(浙江)성 부서기 겸 항저우(杭州)시 서기를 지냈다. 우셴은 허베이(河北)성 우차오(吳橋)사람으로 문화대혁명 중 주자파로 몰려 모진 박해를 받았다. 여러 차례의 인민재판을 받았던 그는 결국 뇌에 손상을 입어 앉아있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언어생활에도 고통이 따랐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던 우셴은 복직을 간절히 희망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복직하지 못한채 2001년 눈을 감았다.

우성리는 1945년 8월 항저우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문화대혁명 개시 2년전인 1964년 19세의 우성리는 인민해방군 측량대학 해양측량과에 입학했다. 이 때부터 그의 해군생활이 시작된다. 졸업후 4척의 중국산 미사일구축함과 호위함선에서 복무했다. 이후 8년동안 구축함, 호위함의 함장을 맡았다.

우성리는 1980년대에서 1990년까지 해군상하이(上海)기지 부참모장을 했으며 대교 계급에 올랐다. 1992년 상하이기지 참모장이 남해함대 부참모장으로 이동해가자, 우성리가 상하이기지 참모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다롄(大連)함정학원 원장도 겸직했으며 소장으로 진급했다.

◆다롄함정학원 원장으로

우성리는 40세에 이미 머리가 벗겨졌다. 기억력이 좋았고, 일욕심이 많았으며, 군기를 엄히 다스려 부하들이 경외했다고 한다. 다롄함정학원은 중국의 웨스트포인트로 불리는 중국 해군의 요람이다. 당시에는 해군에 대한 인기가 유별나게 높았다. 중국군에 대해 정통한 한 인사는 “개혁개방 초기에 바다를 통해 무수한 밀수가 이뤄졌으며, 이 과정에서 해군 관계자들은 많은 부를 취득하게 됐다”면서 “해군에 입대하면 한목 톡톡히 챙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많은 학생들이 다롄함정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했다. 네이멍구의 한 중학생은 “다롄함정학교에 가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가출하기도 했다. 당시 다롄함정학교 교장이었던 우성리 소장은 중국청년보와의 인터뷰에서 청년학생들에게 “학업을 그만두거나 가출을 해서 이곳에 오지는 말아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도 우성리는 “젊은이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면서도 “기밀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군인은 법을 지키면서 사귀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불안한 리더십의 해군을 맡아

우성리는 이어 해군 푸젠기지 사령관을 맡았으며 이후 해군 동해함대 부사령관으로 옮겼고, 광저우(廣州)군구 부사령원 겸 해군 남해함대사령원으로 승진했다. 2004년 6월 우성리는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이 됐다. 해군 장성에 오른지 12년만에 인민해방군 부참모장에 오른 것. 총참모부에서 일한지 1년6개월여가 지난 시점인 2006년1월 칭다오 해군기지를 시찰중이던 해군사령관 장딩파(張定發)가 갑자기 쓰러져 베이징으로 송환된다. 그는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했다. 2006년 8월 우성리는 해군으로 돌아가 해군제7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는 사령관의 갑작스런 교체와 함께 해군부사령원 왕서우예(王守業) 중장이 난잡한 생활태도와 수뢰혐으로 체포돼 해군 내부의 군심이 흔들렸다. 비슷한 시기에 해군의 비행기 한대가 추락한 서건이 일어났고, 일본과의 해상대치로 인해 바다에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우성리는 위기에 임박해 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최초의 해외 해상작전 실행

하지만 우성리가 해군으로 복귀한 후에 국면을 안정시켰고, 17대 중앙위원, 중앙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올라섰다. 우성리의 두명의 선임자들은 모두 불운했다. 2003년 여름의 해군 361잠수함이 사고났고, 70명의 병사들이 사망했다. 해군사령원 스윈성(石雲生)은 낙마했고, 뒤를 이은 장딩파는 부임후 3년만에 병사한 것. 반면 우성리는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다. 4년간 해군을 통솔하면서 사고가 난적이 없을 뿐 아니라 군 기강을 잡았으며 일본, 미국등을 방문했다.

2008년 12월 우성리는 800여명의 병사를 태운 중국해군 함정편대 3척 군함을 하이난 싼야의 항구에서 중동의 에딩만으로 떠나보냈다. 중국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동원해 처음으로 해외에서 국가전력이익을 보호하는 작전이었다. 우성리는 환송의식에서 “중국은 대국의 반열에 오른 이상 국제평화 유지의 의무가 있으며 이를 책임져야 한다”며 “중국의 해군은 각종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갖춰야하고 인본주의와 인도주의를 지지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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