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태권도는 전리품이 아니다

임병식 논설위원
[임병식 순천향대 초빙교수]


1998년 국제로타리 지원으로 두 달여 동안 브라질 연수를 다녀왔다. 그때 만난 상파울루주 마릴리아대학 방근모 교수는 젊은 날 태권도 교관 자격으로 브라질에 정착했다. 그를 통해 라틴아메리카에서 태권도가 차지하는 위상을 접했다. 현지인들은 태권도 사범을 ‘마스터’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우했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태권도인들은 그 나라 경찰과 군에서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태권도 외교’라는 말이 회자한 배경이다. 세계태권도연맹(WT)에 따르면 세계 200여 개국에서 태권도를 수련한다.

태권도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의 무도가 된 지 오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첫선을 보인 뒤 1994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메달을 놓고 겨루기 시작했다. 이런 태권도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목전에 두고 있다. 온 국민이 나서 반길 일이다. 그런데 국내 여론은 싸늘하다. 북한이 먼저 등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무엇이든 북한보다 앞서야 하는 체제경쟁이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도 재현된 셈이다. 태권도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환호는커녕 체제경쟁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으니 씁쓸하다.

태권도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최종 결정은 오는 12월이다. 이변이 없는 한 등재는 기정사실로 보인다. 소식이 알려진 뒤 정부의 늑장 대응을 질타하는 비판이 잇따랐다. 북한보다 늦게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태권도 종주국 지위를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비판이다. 나아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메달 경쟁으로 바라보는 경쟁 지상주의의 또 다른 단면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은 특정 국가에 소유권이나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화 다양성과 인류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공동체가 세대를 이어 전승해 온 무형유산을 보존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무형유산이 여러 국가에 존재할 수 있고, 먼저 등재했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등재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도 아니다.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것은 인류 공동의 문화적 가치다.

선례도 있다. 아리랑은 대한민국이 2012년, 북한이 2014년 각각 등재했다. 김장 문화 역시 대한민국이 2013년, 북한이 2015년 각각 이름을 올렸다. 먼저 등재한 국가가 후발 국가의 등재를 제한하지 못한다. 태권도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이 먼저 등재하더라도 우리 태권도의 역사와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정부가 단독 등재를 추진할 수도 있고, 여건이 갖춰지면 기존 등재 유산에 확장 등재도 가능하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 태권도의 가치는 다른 데 있다. 태권도는 단순한 격투 기술이나 스포츠 경기 종목이 아니다. 예의와 절제, 인내와 극기라는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공동체 규범을 익히는 전승 문화다. 도장에서 사범과 수련생이 만나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무예와 정신을 전하는 생활 문화이기도 하다. 세계인들이 태권도를 정신 수양 수단으로 인식하는 이유다. 태권도는 한국이 세계에 전하는 문화유산이다. 올림픽 메달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인 것이다.

물론 종주국인 우리가 먼저 신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북한은 2024년 3월 신청서를 제출했고 우리는 2026년 3월 신청했다. 국가유산청은 2024년 8월 유네스코 홈페이지를 통해 북한의 신청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올해 1월 국가유산위원회 심의에서 태권도를 차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하고 보완을 거쳐 3월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다. 행정 절차와 대응 시점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동안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놓고 무능과 무책임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남북 공동 등재를 추진한 배경도 살펴봐야 한다. 남북은 단일한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는 만큼 공동으로 보호하고 전승할 무형유산이 적지 않다. 2018년 씨름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다. 남북은 각각 제출한 신청서가 같은 심사 주기에 놓이자 합의해 공동 등재했다. 공동 등재는 어느 한쪽의 양보나 패배가 아니다. 공유하는 문화유산을 함께 보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태권도 공동 등재가 성사되지 못한 것은 냉랭한 남북 관계와 신청 시기 차이 등 현실적 이유 때문이다. 북한이 2024년 신청서를 제출해 심사 절차에 들어간 상황에서 우리는 2년 뒤 신청했다. 남북 간 대화가 단절된 상황에서 공동 등재 합의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국가유산청은 통일부·외교부와 협의는 물론이고 유네스코 관계자 면담과 관계기관 회의를 이어가는 등 공동 등재를 모색해 왔다. 남북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정부의 정책 기조와 공동 등재 추진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청와대 정책실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 관계기관 논의 과정에서 남북 관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단독 등재 신청을 자제하라는 권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이라면 정책적 판단의 책임을 국가유산청에만 돌리는 것이다. 국가유산청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외교·안보 차원의 정책 판단이 작용했다면, 그 결정에 관여한 청와대와 관계 부처가 함께 설명해야 한다.

남북 화해 기조를 위해 단독 등재를 서두르지 않도록 해놓고, 책임을 실무 부처에 떠넘긴다면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정책 방향은 청와대가 결정하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부처가 책임지라는 식이라면 국정 운영의 신뢰를 기대하기 어렵다. 정책실이든 안보실이든 관계기관 판단과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공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책임은 부처에 떠넘기는 행태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호들갑이나 책임 전가가 아니다. 차분하고 전략적인 후속 대응이다. 12월 최종 등재 결정을 지켜본 뒤 확장 등재를 추진할지, 아니면 단독 등재 절차를 밟을지 판단하면 된다. 북한이 응답하지 않으면 단독 등재도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 2027년 초 공모를 통해 신청 대상을 다시 선정해야 한다. 서두르되 서두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듭 말하지만 태권도는 남북이 경쟁해 한쪽이 차지하는 전리품이 아니다. 남과 북이 함께 발전시키고 세계에 전파할 문화적 자산이다. 북한이 먼저 등재한다고 해서 우리가 태권도 종주국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태권도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더 깊이 연구하고, 남북이 함께 보존 전승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태권도에도, 남북관계에도 도움이다.

필자 주요 이력

▷감사원 정책자문위원 
▷국가유산위원 ▷국가유산청 정책자문위원 ▷순천향대 초빙교수 ▷전 국회의장 정무비서관 ▷전 국회 부대변인 ▷전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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