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Spiritual Asia)㊳ | 이슬람교 이야기 ①] 무함마드, 사막에서 들려온 하나의 목소리

[사진=챗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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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서 모세와 예수를 지나 무함마드로, 메카에서 히라산과 메디나로…“알라는 한 분이다”, 인간은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기독교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갔다. 2000년을 살아온 기독교는 오늘도 사랑하고 있는가를 물었고, 결국 예수가 처음 던졌던 질문과 다시 만났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로부터 약 600년 뒤, 갈릴리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 사막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사랑이라는 말에 앞서 인간의 오만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수많은 우상과 부족의 신들을 넘어 오직 하나의 신을 바라보라고 했으며, 부자와 권력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과 고아, 과부와 약한 사람에게도 눈을 돌리라고 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함마드였다.

그가 전한 신은 새로운 신이 아니었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그 신은 아브라함의 신이고 모세의 신이며 예수의 신이다. 아랍어로 ‘알라(Allah)’라고 부르는 유일신이다. 꾸란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를 중요한 예언자로 거듭 언급하며 무함마드 자신도 그 예언자 전통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가르친다.

유대교가 계약을 말했다면 기독교는 사랑을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은 인간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사막, 부족 그리고 메카

종교는 하늘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땅 위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태어난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무함마드가 태어난 6세기 후반의 아라비아반도에는 오늘날과 같은 강력한 단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부족이 혈연과 동맹을 중심으로 살아갔다. 부족은 개인을 보호하는 울타리인 동시에 생존의 조건이었으며, 사막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물과 목초지를 둘러싼 경쟁과 부족 간 분쟁과 복수도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아라비아가 문명과 단절된 변방만은 아니었다. 북쪽에는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있었고, 홍해와 아라비아를 거쳐 시리아와 예멘, 동아프리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교역의 길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길 한가운데 메카가 있었다.

메카에는 카바가 있었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이 기도할 때 향하는 바로 그곳이다. 이슬람 이전에도 카바는 아라비아 여러 부족이 찾는 중요한 성소였으며 주변에는 여러 우상이 있었다. 순례와 교역이 만나면서 메카는 종교적 공간인 동시에 상업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무함마드다.
 
고아에서 상인으로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보호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전승에 따르면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그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할아버지와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고아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훗날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 꾸란에는 고아와 가난한 사람, 여행자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호하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라는 가르침이 반복된다.

무함마드는 성장하면서 상업에 종사했고 대상무역과 관련된 일을 했다. 훗날 부유한 상인이었던 하디자와 결혼했는데, 하디자는 단순히 그의 아내였던 것만이 아니었다. 무함마드가 자신의 종교적 체험 앞에서 두려움과 혼란을 느꼈을 때 그를 믿고 지지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슬람 전통에서는 최초의 신앙인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상업도시 메카의 번영 속에서 다른 현실도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는 늘어났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부족의 힘과 재산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했으며 고아와 가난한 사람,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쉽게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인간은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부와 권력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을 품은 무함마드는 때때로 메카를 떠나 홀로 사색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향한 곳이 히라산의 동굴이었다.

“읽으라”

610년경, 무함마드가 약 마흔 살이던 때였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최초의 계시를 받았다.

그 시작을 상징하는 말이 있다.

“읽으라.”

이 한마디는 이후 이슬람 문명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문자와 지식, 암송과 교육을 중시하는 거대한 문명이 사막에서 받은 최초의 계시를 ‘읽으라’는 명령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았다. 신의 아들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인간, 곧 예언자이며 사도라고 이해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신은 하나이며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 인간은 그분 앞에서 자신의 오만을 내려놓아야 하고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강한 부족 사람도 약한 부족 사람도 마지막에는 같은 신 앞에 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의 출발이었다.
 
알라, 새로운 신인가

한국인에게 ‘알라’라는 말은 때때로 이슬람교만의 특별한 신의 고유명사처럼 들리지만 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 곧 유일신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 역시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른다.

다만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은 서로 같지 않다. 특히 예수에 대한 이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기독교가 예수를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데 비해 이슬람은 예수를 매우 중요한 예언자이자 메시아로 존중하면서도 신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는다. 꾸란에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중요하게 등장하지만 예수의 신성과 십자가 죽음에 관한 이해 역시 기독교와 다르다.

그러므로 세 종교가 아브라함의 전통을 공유한다고 해서 세 종교의 신학까지 같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뿌리에서 서로 다른 가지가 자랐다.

유대교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계약을 중심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고,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유일신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완성한다는 자기이해를 갖게 됐다. 꾸란은 아브라함을 유일신 신앙의 중요한 모범으로 제시하며 메카의 카바 역시 이슬람 전통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를 지나 이슬람으로 오는 우리의 「아시아의 영성」 여정은 서로 무관한 세 종교를 차례로 방문하는 여행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오래된 우물에서 갈라져 나온 세 개의 거대한 물줄기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꾸란, 읽는 책이면서 듣는 말씀

기독교의 중심에 성경이 있고 유대교의 중심에 토라가 있다면 이슬람의 중심에는 꾸란이 있다. 그러나 꾸란을 기독교의 성경과 완전히 같은 방식의 책으로 이해하면 이슬람의 경전관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무슬림에게 꾸란은 무함마드가 자신의 종교사상을 정리해 저술한 책이 아니다. 이슬람 신앙에서 꾸란은 알라가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말씀이다. 계시는 한 번에 완성된 책의 형태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가 예언자로 활동하는 동안 여러 상황에서 이어졌고 그것이 암송되고 기록되고 전승되면서 꾸란을 이루었다.

‘꾸란(Qur'an)’이라는 말 자체도 ‘낭송’ 또는 ‘읽음’과 연결된다. 그래서 꾸란은 눈으로 읽는 책이면서 귀로 듣는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의 무슬림들은 아랍어 꾸란을 암송하며 모국어가 아랍어가 아닌 사람들도 꾸란의 구절을 아랍어로 외운다. 번역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슬람 전통에서는 아랍어 원문에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

꾸란은 114개의 수라, 곧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은 다시 아야라고 부르는 구절들로 구성된다. 배열도 우리가 익숙한 역사책이나 전기처럼 시간순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처음 꾸란을 읽는 사람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주제가 있다. 신은 하나이며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이고 마지막 심판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인간은 자신의 오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모세·예수 그리고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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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을 읽다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를 공부한 사람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계속 나타난다.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이삭과 야곱, 요셉과 모세, 다윗과 솔로몬,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고 마리아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이슬람의 독특한 역사관이 드러난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신은 인간에게 단 한 번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예언자를 보냈으며 인간은 그들을 통해 신의 뜻을 전달받았다. 무함마드는 그 긴 계보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자기이해에서 이슬람은 7세기에 갑자기 생겨난 전혀 새로운 신앙이라기보다 아담에서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를 거쳐 이어진 유일신 신앙의 본래 길을 다시 확인하고 완성하는 종교다.

물론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러한 이슬람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로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종교 간 대화의 출발은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정확히 아는 데 있다.

다름을 지우는 것이 관용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상대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 관용이다.
 
메카의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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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는 한 분이다”라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 단순한 종교적 명제처럼 들릴 수 있지만 당시 메카에서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 여러 부족의 우상과 전통이 카바를 중심으로 공존했고 그것은 종교뿐 아니라 부족의 명예와 사회관계, 경제적 이해와도 연결돼 있었다.

더구나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단순히 우상을 버리라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되며 고아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고 마지막 심판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신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 책임져야 한다면 돈과 부족과 권력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

종교적 메시지가 사회적 질문이 되는 순간이었다.

메카의 유력자들과 무함마드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초기 신자들은 압박과 박해를 경험했다. 그러나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히즈라, 떠남으로 시작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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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년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메카를 떠나 야스리브로 이동했다. 훗날 ‘예언자의 도시’라는 의미의 메디나로 불리게 되는 곳이다.

이 사건이 히즈라다. 단순한 피난이 아니라 이슬람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이었고 오늘날 이슬람력도 이 히즈라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흥미롭게도 아브라함계 종교의 역사에는 ‘떠남’이 반복된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고 모세와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떠났으며 예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넘어 세계로 떠났다. 그리고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갔다.

영성의 역사는 때때로 떠남의 역사다. 익숙한 것에서 떠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더 이상 박해받는 작은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만이 아니었다. 종교공동체를 이끌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며 정치적·군사적 문제까지 책임지는 지도자가 됐다.

여기에서 이슬람은 초기 기독교와 다른 역사적 길을 걷는다. 예수는 국가를 세우지 않았고 군대를 지휘하지 않았으며 초기 기독교도 오랫동안 국가권력 밖에서 성장했다. 반면 무함마드는 생전에 종교공동체와 정치공동체가 결합된 사회를 이끌었다.

이 차이는 훗날 기독교와 이슬람이 종교와 국가, 신앙과 법, 종교적 권위와 정치권력을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지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편의 거대한 질문이 싹튼다.

신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가 권력을 갖게 되면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움마, 혈연을 넘어선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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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에서 중요한 개념 하나가 구체적인 공동체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움마(Ummah)’다. 부족사회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혈연에 크게 의존했고 어느 부족에서 태어났느냐가 보호와 명예, 생존을 좌우했다.

그러나 이슬람 공동체는 혈연만으로 묶이지 않는 새로운 결속을 만들어갔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관계가 형성됐다. 당시 아라비아의 부족질서 속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러나 움마 역시 인간이 만드는 공동체다. 공동체가 커지면 지도력이 필요하고 지도력에는 권력이 따른다. 권력이 생기면 누가 지도할 것인지, 무엇이 정당한 권력인지, 신앙과 정치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를 둘러싼 문제가 나타난다.

무함마드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의 권위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은 훗날 수니와 시아라는 이슬람의 거대한 두 흐름이 갈라지는 역사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음 이야기다.
 
다섯 기둥, 믿음을 하루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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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관념만의 종교가 아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다.

첫째는 신앙고백인 샤하다다.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라는 고백으로, 이 짧은 문장 안에 이슬람 신앙의 핵심이 들어 있다.

둘째는 예배인 살라트다. 무슬림은 하루 다섯 차례 메카의 카바 방향을 향해 기도한다. 왕도 부자도 노동자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몸을 숙인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기억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자선인 자카트다. 자신의 부 가운데 일정 부분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의무로, 재산은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회적 책임이 신앙 안으로 들어온다. 

넷째는 라마단의 금식인 사움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과 음료 등을 삼가며 욕망을 절제하고, 배고픔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면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과 인간의 한계를 돌아본다. 

다섯째는 메카 순례인 하지다. 여건이 허락하는 무슬림은 일생에 한 번 메카를 순례하며 서로 다른 나라와 인종, 언어와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성지를 향한다.

믿음이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시간과 몸, 돈과 욕망, 여행과 공동체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카바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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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기간 메카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피부색과 직업, 국적과 재산도 다르지만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한다. 카바다. 카바 자체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을 향해 세계의 무슬림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통일성의 상징이다.

그 앞에서는 왕도 평범한 사람도 신 앞의 한 인간이다.

이 장면 속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중요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높아지려고 하지만 종교는 낮아지라고 하고, 인간은 더 많이 가지려 하지만 나누라고 하며, 욕망을 따라가려 하지만 절제하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 하지만 이슬람은 신을 중심에 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슬람(Islam)’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종교적 의미 가운데 하나가 신에게 자신을 맡기고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복종’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한다. 독재자에게 복종하라는 뜻도 아니고 국가권력이나 종교지도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라는 의미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신 앞에서 인간 자신의 오만을 내려놓는 것이다.
 
복종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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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역설적인 질문이 생긴다. 복종하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현대인은 자유를 무엇에도 복종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아무것에도 복종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돈에 복종할 수도 있고 권력에 복종할 수도 있으며 욕망과 명예, 인기와 집단의 시선, 자신의 탐욕에 복종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여도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이 말하는 신에 대한 복종을 또 다른 방향에서 읽을 수 있다. 인간이 돈을 신으로 만들지 않는 것, 권력을 신으로 만들지 않는 것,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절대자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수많은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슬람의 영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아시아의 영성」에서 걸어온 여러 길과 만난다.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했고 도교는 억지로 세상을 움켜쥐려 하지 말라고 했으며 유교는 욕망을 절제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라고 했다. 기독교의 예수는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슬람은 말한다.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으라.

표현과 교리는 서로 다르지만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메카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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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로 떠났던 무함마드는 여러 해의 갈등과 전투, 협상과 세력관계의 변화를 거쳐 630년 메카에 들어갔다. 카바의 우상들이 제거되면서 카바는 유일신 신앙의 중심 성소로 자리 잡았고,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떠났다.

약 20여 년 전 히라산 동굴에서 홀로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아라비아에는 새로운 종교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이슬람 역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누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것인가. 예언자는 다시 나올 수 없는데 공동체의 지도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혈통인가, 합의인가, 신앙인가, 능력인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이슬람의 두 번째 거대한 이야기를 연다.

다석 유영모, ‘제나’를 내려놓는다는 것

여기에서 잠시 아라비아 사막을 떠나 20세기 한국의 한 사상가를 만난다.

다석 유영모다.

다석은 기독교를 깊이 공부했지만 서양의 기독교를 그대로 옮겨놓는 데 머물지 않고 유교와 불교, 도교를 함께 읽으면서 동서양의 영성을 한국인의 언어로 회통하려 했다. 그가 인간을 바라보면서 특별히 구분했던 것이 ‘제나’와 ‘얼나’다.

제나는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나이며, 얼나는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넘어 더 큰 생명과 진리를 향해 솟아오르는 참된 나를 가리킨다. 다석에게 인간의 영적 과제는 제나를 끝없이 확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나를 넘어 얼나로 솟나는 데 있었다.

물론 다석의 ‘하나’와 이슬람의 알라를 같은 신학적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석의 얼나와 이슬람의 복종도 같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다. 서로 다른 역사와 종교전통 속에서 나온 사상이며 그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유가 만날 수 있는 질문은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해도 되는가.

이슬람은 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고 한다. 다석은 욕망에 사로잡힌 제나를 넘어 얼나로 솟나라고 한다. 하나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태어난 유일신 신앙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동서양의 종교를 함께 읽은 한국 사상가의 언어이지만, 두 언어 모두 인간의 자기절대화와 오만에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 어쩌면 영성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진리·정의·자유, 그리고 인간·문화·자연

우리는 「아시아의 영성」을 걸으며 어떤 종교를 믿으라고 권하기 위해 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기본과 원칙, 상식 위에서 사실을 바라보고 진리를 찾으며 정의를 묻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인간과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도 편견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이슬람을 테러와 전쟁의 이미지로만 바라보는 것은 1400년에 걸친 거대한 종교와 문명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슬람 역사에서 일어난 전쟁과 정복, 종파갈등과 권력투쟁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빛은 빛대로 보고 그림자는 그림자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고 원칙이며 상식이다. 유대교도 그렇게 보았다. 기독교도 그렇게 보았다. 이슬람도 그렇게 볼 것이다.

종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모든 역사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며, 종교를 비판한다는 것도 그 종교를 믿는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진리는 사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하고 정의는 약한 사람의 편에 서게 하며 자유는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의 신앙과 비신앙의 자유까지 존중하게 한다.

그리고 인간·문화·자연에 대한 사랑은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을 적으로 만들기 전에 먼저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인간은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가

이제 다시 히라산 동굴로 돌아간다. 한 사람이 홀로 앉아 있고 밖에는 사막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메카의 시장과 카바가 있다. 대상의 낙타들이 오가고 상인들은 돈을 벌며 부족들은 자신의 신과 명예를 지킨다.

그러나 동굴 속의 한 인간은 더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부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왜 돌보아야 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보다 더 큰 존재 앞에서 나는 무엇인가.

무함마드가 전한 대답은 분명했다.

신은 하나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이 단순한 선언에서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종교와 문명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인간이 “신은 하나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누가 신의 뜻을 해석하는가. 누가 공동체를 이끄는가.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 권력은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가.

기독교 이야기에서 우리가 던졌던 질문이 다른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바뀐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신앙이 인간의 권력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질문을 따라가면 무함마드 사후의 칼리프를 만나고 알리와 후세인을 만나게 된다. 수니와 시아가 갈라지는 역사를 지나 우마이야와 아바스의 거대한 제국으로 들어가며, 바그다드에서는 철학자와 의사, 수학자와 천문학자를 만나고 이슬람 문명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지식을 받아들여 어떻게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냈는지도 보게 될 것이다.

사막에서 시작된 신앙이 세계문명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문 앞에서 멈춘다. 아브라함은 떠났고 모세는 자유를 향해 걸었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무함마드는 다시 인간에게 ‘하나’를 바라보라고 외쳤다. 서로 다른 시대였고 서로 다른 언어였으며 마침내 서로 다른 종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의 깊은 곳에는 하나의 긴장이 흐른다.

인간은 자신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살아도 되는가. 욕망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되는가. 힘이 있다고 모든 것을 해도 되는가. 돈과 권력이 인간보다 위에 있어도 되는가.

21세기의 인간은 7세기의 아라비아인이 상상할 수 없었던 힘을 갖고 있다. 원자를 쪼개고 유전자를 편집하며 우주로 나아가고 이제는 인간의 지능을 닮은 AI까지 만들고 있다.

그래서 1400년 전 사막에서 던져진 질문이 오히려 오늘 더 절실할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으려는 유혹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다석은 욕망과 집착에 갇힌 ‘제나’를 넘어 ‘얼나’로 솟나야 한다고 했다. 이슬람은 신 앞에서 인간의 오만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서로 다른 길이지만 오늘의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은 묘하게 한곳에서 만난다.

나는 나 자신을 절대화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기독교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지식에서 지혜로, 부에서 나눔으로, 힘에서 책임으로, 지능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슬람의 첫 번째 이야기는 그 앞에 한마디를 더 놓는다.

오만에서 겸허로.

인간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될수록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은 아니라는 절제가 필요하다. 지능이 높아질수록 지혜가 필요하고 부가 커질수록 나눔이 필요하며 힘이 강해질수록 책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절대화할수록 영성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막에서 시작된 이슬람의 첫 번째 질문이다.
인간은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질문을 품고 사막 밖으로 나간다.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뒤 하나였던 움마는 지도자를 둘러싼 문제와 마주하고 칼리프와 알리, 후세인과 카르발라, 수니와 시아, 우마이야와 아바스, 바그다드와 이슬람 문명의 황금시대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가 펼쳐진다.

신앙은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는 권력을 만나며 권력은 제국과 문명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물을 것이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신앙이 인간의 권력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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