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Spiritual Asia)㊱ | 기독교 이야기 ②] 사랑은 어떻게 교회와 문명이 되었는가

  • 베드로와 바울에서 로마·니케아·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으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과 개신교, 그리고 조선의 천주교까지…

  •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은 사랑이었다. 예수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영토도 궁전도 없었고 제국을 다스릴 관료도, 후세에 물려줄 재산도 없었다. 그가 남긴 것은 사람들과 몇 마디 말, 그리고 자신의 삶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까지 사랑하라. 가장 작은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 높아지려거든 낮아지고, 섬김을 받으려거든 먼저 섬겨라.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났어야 했다. 지도자는 처형됐고 제자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은 사람들이 다시 모였고, 그 작은 공동체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도시를 넘어가고 국경을 넘어갔다. 박해 속에서도 로마제국 곳곳으로 퍼졌고 마침내 황제가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으며, 훗날 유럽 문명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사랑은 신앙이 되었고 신앙은 공동체가 되었으며 공동체는 교회가 되고 제도가 되고 문명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시작됐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베드로와 바울, 교회가 길을 떠나다
예수가 떠난 뒤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중심에는 베드로가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다. 예수를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두려워했고 넘어졌으며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섰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교회는 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넘어지고 후회하며 다시 시작하는 인간들의 공동체였다. 베드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고, 후대 서방교회는 베드로와 로마교회의 관계를 로마 주교와 교황직 전통의 중요한 뿌리로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가 예루살렘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간 과정을 이해하려면 또 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바울이다. 그는 예수의 생전 제자가 아니었고 처음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반대했지만 극적인 회심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바울의 결정적 의미는 예수에 대한 신앙을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세계로 확장하는 데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그리고 로마로 길이 열렸다. 이 과정에서 초기 공동체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했다. 예수를 따르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 모세의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하는가. 이방인도 직접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가.

초기 공동체 안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 선교의 길이 열리면서 예수 운동은 점차 유대교 내부의 한 흐름을 넘어 독자적인 세계종교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교가 디아스포라를 통해 책과 질문을 세계 곳곳으로 가져갔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의 도시와 도로, 교통망과 공용어를 이용해 복음을 전했다.

제국이 정복과 통치를 위해 만든 길을 선교사들이 걸었다. 역사의 역설이었다.
 
박해받던 교회가 제국을 만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강자가 아니었다. 로마제국이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똑같은 강도로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황제와 시기에 걸쳐 기독교 공동체는 탄압을 경험했다. 황제숭배와 다신교적 공적 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때로 제국의 종교·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 시기 교회의 힘은 권력이 아니라 증언에 있었다. 죽일 수는 있어도 믿음을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강대한 제국과 힘없는 신앙공동체가 마주했다. 그런데 역사가 뒤집혔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됐다. 313년 이른바 밀라노 칙령으로 알려진 조치를 통해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적 관용이 제도적으로 확대됐고, 기독교는 오랜 박해에서 벗어나 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얻었다. 교회를 세울 수 있었고 공동체를 제도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게 됐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방이었다. 그러나 모든 해방에는 새로운 책임이 따라온다. 박해받던 교회가 황제의 보호를 받기 시작하면서 교회와 권력의 관계라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권력이 교회를 보호하는 것인가, 교회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황제의 권한은 어디까지이며 주교의 권위는 어디까지인가.

갈릴리에서 시작된 사랑의 공동체가 제국의 궁정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이제 피해자의 종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힘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질문받는 종교가 됐다.
 
니케아, 신앙이 교리가 되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에 여러 지역의 주교들을 모았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였다.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치열한 신학 논쟁이 있었다. 성자는 피조물인가, 성부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교회는 격렬하게 논쟁했고 이 과정에서 니케아 신경의 토대가 마련되면서 훗날 삼위일체 교리로 발전하는 중요한 신학적 언어가 정립됐다. 신앙이 교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공동체가 무엇을 믿는지를 설명하려면 언어와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준이 생기는 순간 또 다른 질문도 생긴다. 누가 정통을 결정하는가. 누가 이단을 규정하는가. 진리를 지키기 위한 교회의 권위는 어디까지 행사될 수 있는가.

사랑으로 시작한 공동체가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제도를 만들었고, 그 제도가 다시 권력이 될 가능성도 함께 생겼다. 기독교 2000년을 관통하는 오래된 긴장이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 제국보다 인간의 내면을 보다
로마제국 말기의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아우구스티누스를 지나갈 수 없다.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그는 젊은 시절 욕망과 방황을 경험했고 오랜 지적·영적 여정 끝에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다.

그의 관심은 인간의 내면으로 향했다. 인간은 선을 알면서 왜 악을 행하는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왜 욕망의 노예가 되는가. 하나님의 은총이란 무엇이며 역사는 어디로 향하는가.

로마가 흔들리던 시대에 그는 《신국론》을 통해 지상의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했다. 세상의 제국은 영원하지 않다. 로마도 무너질 수 있다. 인간은 눈앞의 권력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어떤 국가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거대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그 질문은 오늘에도 살아 있다.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국가를 신격화하는 것은 다르다. 종교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과 종교 자체가 권력이 되는 것 역시 다르다.
 
수도원, 권력에서 다시 광야로
교회가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과 재산을 갖게 되자 역설적으로 세상을 떠나 광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수도자들이었다. 초기 수도자들은 사막과 외딴 곳을 찾아갔다. 교회가 제국의 보호를 받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가면서 초기 기독교의 가난과 절제, 기도와 자기희생의 정신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움직였다.

소유를 줄이고 기도하고 일했다. 후대 서방 수도원의 중요한 정신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로 압축됐다.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시설에 머물지 않았다. 중세 유럽에서 교육과 필사, 학문과 농업, 구호와 의료, 여행자 보호의 공간이 됐고 사회가 혼란할 때 책과 고전을 보존하며 배움의 불씨를 지키기도 했다.

권력을 얻은 교회 안에서 다시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종교는 제도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처음으로 돌려보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 한 뿌리에서 두 문명으로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고 서로 다른 정치·언어·문화 환경이 굳어지면서 동방과 서방의 교회도 점차 다른 모습을 갖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서로마제국이 붕괴한 뒤 정치질서가 흔들리는 과정에서 로마 주교의 권위가 더욱 커졌고, 로마교회는 종교뿐 아니라 사회적 안정과 외교, 행정과 구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교황제도가 발전했고 라틴어가 서방교회의 언어가 됐다. 신학과 교회법, 수도원과 성당, 대학과 예술이 결합하면서 훗날 로마 가톨릭이라고 부르게 되는 거대한 전통이 형성됐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 자체에는 본래 ‘보편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서방만이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었다. 동로마, 곧 비잔티움 세계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기독교 문명이 성장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같은 오래된 교회들이 있었고, 그리스어와 그리스 철학의 전통 속에서 신학과 전례, 성화와 수도생활, 교부들의 사상이 발전했다.

서방에서는 로마 주교의 보편적 권위가 강화됐지만 동방에서는 여러 총대주교좌의 공동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전통이 발전했다. 언어가 달라지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달라졌으며 교회권위에 대한 이해도 차이를 보였다. 성령의 발출을 둘러싼 이른바 ‘필리오케’ 논쟁을 비롯한 신학적 차이도 갈등을 깊게 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전통은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갔다. 
 
1054년, 동과 서가 갈라지다
1054년은 동서교회의 대분열을 상징하는 해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오랜 갈등이 상호 파문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다. 그러나 천 년 가까이 함께한 교회가 그해 어느 하루아침에 정확히 둘로 갈라졌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동서의 차이는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됐고 1054년 이후에도 관계는 이어졌다. 훗날 십자군과 정치적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그럼에도 1054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이다. 서방은 로마 가톨릭교회로, 동방의 주요 교회들은 오늘날 동방정교회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됐다. 같은 예수를 믿었다. 같은 복음서를 읽었고 초기 공의회의 중요한 전통도 공유했다. 그런데 갈라졌다.

종교사의 오래된 역설이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진리를 지키려는 열정이 때로 서로를 배척하는 힘으로 변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내가 이해한 진리만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다르다.
 
가톨릭과 정교회, 두 개의 오래된 강
분열 이후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 다른 문명권에서 발전했다. 가톨릭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교황제도와 수도원, 대학과 스콜라철학, 고딕성당과 예술, 교육과 선교를 통해 서양문명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정교회는 비잔티움에서 슬라브 세계로 퍼져나가 그리스와 발칸,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성화와 향, 장엄한 전례와 신비주의적 영성은 서방교회와 또 다른 기독교의 얼굴을 만들었다. 신앙을 논리적 명제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신비 속에서 체험하려는 전통도 깊었다.

동과 서. 모습은 달라졌지만 근원은 하나였다. 예수였다.
 
중세교회, 빛이 커지자 그림자도 깊어졌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는 거대한 힘을 갖게 됐다. 왕의 권위와 경쟁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기도 했고 광대한 토지와 재산을 소유했으며 교육과 학문, 문화와 예술에서 막대한 역할을 했다.

수도원은 지식을 보존했고 대학이 성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상가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했고,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평화,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통해 부유해진 교회에 복음의 처음을 다시 상기시켰다. 병원과 구호시설이 만들어졌고 찬란한 성당과 음악, 미술과 건축이 탄생했다.

그러나 빛이 커지면서 그림자도 깊어졌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고 종교적 강제와 박해가 있었으며 교회권력과 정치권력이 충돌하거나 결탁했다. 성직매매와 부패, 권력다툼도 나타났다. 예수는 제자의 발을 씻겼는데 그의 이름을 내건 교회는 때로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갖게 됐다.

그래서 처음의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권력은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만들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종교의 이름을 갖는다고 자동으로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종교 역시 인간의 손을 통해 움직이고 인간은 권력을 갖는 순간 언제나 절제의 시험을 받는다.
 
루터, 교회에 다시 질문하다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이자 신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당시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교회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했다. 95개조 논제가 거대한 불씨가 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본질을 면죄부 하나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 밑에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다.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은 어떤 관계인가. 성경과 교회의 권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신앙이 제도를 위해 존재하는가, 제도가 신앙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쇄술이라는 당시의 새로운 미디어 기술은 개혁의 사상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고 더 많은 사람이 직접 성경을 읽게 되면서 질문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갔다.

다시 질문의 시대가 열렸다.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탄생
루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츠빙글리와 칼뱅을 비롯한 여러 개혁자가 등장했고 영국에서는 또 다른 정치적·종교적 과정을 통해 성공회 전통이 형성됐다. 서방 기독교는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개신교가 탄생했다.

그러나 개신교 역시 하나의 단일 교회가 아니었다. 루터교와 개혁교회, 성공회가 형성됐고 이후 침례교·감리교를 비롯한 다양한 교파와 운동이 등장했다.

가톨릭교회 역시 변화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리와 제도를 정비하고 내부 개혁을 추진했으며 예수회는 교육과 학문, 세계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종교개혁은 서양의 종교지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교육과 정치, 경제와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개혁이 곧바로 평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종교전쟁과 박해가 이어졌고 같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죽이는 비극도 벌어졌다. 여기에서 다시 묻게 된다. 신앙이 인간을 사랑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복음은 처음부터 동쪽으로도 흘렀다
기독교를 서양 종교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출발부터 서아시아의 종교였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기독교는 일찍부터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와 인도, 중국을 향해서도 이동했다. 동방 기독교의 오래된 길이 존재했다.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아시아에 들어왔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종교만 전하려 하지 않았다. 천문학과 수학, 지도제작과 과학지식을 함께 가져왔고 중국의 언어와 고전을 배우면서 유교 지식인들과 대화하려 했다. 마테오 리치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지식인들과 만나면서 만들어낸 서학의 책들이 조선에도 들어왔다.

그리고 조선에서 세계 교회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조선의 선비들이 책에서 천주를 만나다
한국 천주교의 출발은 매우 독특하다. 많은 나라에서는 외국 선교사가 먼저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지만 조선에서는 지식인들이 먼저 책을 읽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를 연구하면서 천문과 지리, 수학과 과학을 접했고 그 책 속에서 천주교라는 낯선 종교와 만났다.

그들은 질문했다. 천주는 무엇인가. 인간은 왜 평등한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책과 질문이었다. 유대교에서 우리가 만났던 오래된 문명의 방식이 조선에서도 되풀이됐다. 새로운 세계는 때때로 군대보다 책을 통해 먼저 들어온다.

1784년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벽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과 신앙을 나눴고 자발적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조선 천주교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성직자가 먼저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평신도 지식인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곧 거대한 충돌이 시작됐다.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를 국가와 사회의 근간으로 삼았고 특히 조상제사는 개인적 의례를 넘어 가족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제도였다. 천주교 신앙과 제사 문제가 충돌했고 신분질서와 인간평등에 관한 새로운 생각 역시 기존 체제와 긴장을 만들었다. 국가권력은 천주교를 단순한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흔들 수 있는 사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박해가 시작됐다.
 
로마에서 조선까지, 다시 순교자의 종교로
역사는 이상할 만큼 되풀이된다. 로마에서 박해받던 기독교는 유럽에서 거대한 권력이 됐고, 그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다시 힘없는 사람들의 종교가 됐다.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여러 차례 박해가 이어졌고 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었다. 왕도 없었고 군대도 없었다. 화려한 교회 건물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믿음이었다.

2000년 전 로마의 초기 신앙공동체와 18·19세기 조선의 천주교 공동체 사이에는 시간과 문화의 거대한 거리가 있지만 한 가지는 닮아 있었다.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기독교 역사의 기묘한 순환을 발견한다. 박해받는 종교는 자유를 요구하지만, 권력을 얻은 종교는 때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것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종교와 이념, 국가와 권력이 기억해야 할 인간사의 오래된 경고다.
 
사랑과 권력
기독교 2000년을 한마디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 역사에는 성인과 순교자가 있고 권력자와 정복자도 있다. 병원을 만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쟁을 정당화한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 곁으로 간 수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궁정과 권력 가까이에서 살았던 성직자도 있었다. 책을 보존한 수도원이 있었고 다른 생각을 억압한 종교권력도 있었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싸운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성경을 이용해 노예제를 옹호한 기독교인도 있었다.

같은 십자가 아래에서 어떻게 이렇게 다른 행동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종교를 믿는다고 인간의 욕망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도 인간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 권력과 욕망의 시험을 받는다. 그래서 종교에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이 언제나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처음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위기다.
 
다시 갈릴리로
가톨릭도 예수에게서 시작했다. 정교회도 예수에게서 시작했다. 개신교도 예수에게서 시작했다. 역사는 세 개의 큰 강줄기를 만들었지만 그 물의 근원은 하나다. 갈릴리다. 가난한 사람들과 밥을 먹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다.

그렇다면 가톨릭이 자신을 돌아보는 마지막 기준도 예수여야 한다. 정교회가 자신을 돌아보는 기준도 예수여야 하며 개신교 역시 다르지 않다. 교황의 권위보다 먼저 예수가 있고 총대주교의 전통보다 먼저 예수가 있으며 목사와 교단보다 먼저 예수가 있다.

성당과 교회와 수도원보다 먼저 사랑이 있었다. 제도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사랑이 제도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는가. 이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종교는 목적과 수단을 뒤바꾼다.
 
다석 유영모, 교회보다 예수를 묻다
여기에서 다시 다석 유영모에게 돌아간다. 다석은 성경을 깊이 읽었지만 제도와 형식에 머무르는 신앙을 경계했다. 그의 관심은 예수라는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는가보다 예수의 길을 인간이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있었다.

자기를 비우는 것, 낮아지는 것, ‘제나’를 넘어 참된 ‘얼나’로 솟나는 것, 그리고 ‘하나’를 향하는 것.

기독교 2000년의 역사도 결국 이 질문 앞에 선다. 얼마나 많은 성당과 교회를 세웠는가보다 그 안에서 어떤 인간을 만들었는가. 얼마나 많은 신자를 얻었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렸는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졌는가보다 그 힘으로 누구를 지켰는가.

유대교 이야기 마지막에서 던졌던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그대가 얻은 힘은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진리·정의·자유
진리를 지키려는 열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순간 진리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증오와 복수를 정당화한다면 정의는 본래의 얼굴을 잃는다.

자유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믿을 자유가 있다면 다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믿거나 믿지 않을 자유도 존중해야 한다. 내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다면 다른 종교의 자유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자유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에는 종교의 자유를 원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힘을 가진 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지켜주는 것이 그 기억에 대한 책임이어야 한다. 힘은 기억을 잃을 때 위험해진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
갈릴리에서 시작한 작은 물줄기는 거대한 강이 됐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안디옥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로 흘렀다.

그 길에서 베드로와 바울을 만났고 순교자들을 만났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박해에서 벗어났고 니케아에서 신앙을 교리의 언어로 정리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봤고 수도원에서는 세상의 권력에서 다시 광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하나였던 교회는 긴 세월을 지나 동과 서로 갈라졌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되었다.

서방교회는 다시 루터의 질문 앞에 섰고 종교개혁을 거쳐 개신교라는 새로운 흐름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 긴 강물의 한 지류가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의 선비들은 책을 읽었다. 질문했다. 그리고 스스로 믿기 시작했다. 2000년의 시간이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책 한 권과 질문 하나,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또 다른 거대한 질문 앞에 서 있다. 과거에는 교회가 제국의 권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문제였다면 오늘은 국가와 자본, 과학과 기술의 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문제가 됐다.

과거에는 황제와 교황의 관계가 문제였다면 오늘은 국가와 종교, 시장과 종교, 과학과 종교,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새로운 질문이 됐다. 그리고 인간은 역사상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힘을 손에 들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다.

인간보다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빠르게 계산하며 여러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AI 앞에서 기독교는 다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자유의지와 책임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은 지능에서 오는가. 기계가 인간보다 똑똑해진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인가.

그리고 2000년 전 갈릴리에서 시작된 가장 오래된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사랑할 수 있는가.

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가 2000년 동안 만들어온 거대한 문명을 지나 다시 예수 앞에 설 것이다. 과학과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인권, 교육과 의료, 선교와 식민주의, 전쟁과 평화, 한국 기독교의 빛과 그림자, 기후위기와 불평등, 그리고 AI 시대의 인간 존엄까지 묻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는 다시 다석의 ‘하나’와 ‘얼나’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2000년의 마지막 질문도 결국 처음의 질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는 오늘도 사랑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 교회는 권력을 넘어 책임으로, 제도를 넘어 사람으로, 교리를 넘어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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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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