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위플래시' 사람을 몰아붙여서 성장시켰다면 성공일까?

  • 인정 욕구와 통제적 동기 부여가 만날 때, 결과편향·생존자 편향이 만드는 착각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빨랐나, 느렸나."

앤드루 니먼(마일스 텔러)은 대답하지 못한다.

테런스 플레처(J.K. 시몬스)는 재즈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 최고의 밴드를 이끄는 교수다. 그는 혼자 드럼을 치던 앤드루를 발견해 자신의 밴드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첫 합주에서 앤드루의 머리를 향해 의자를 던진다. 박자가 빨랐는지 느렸는지 답하지 못하자 뺨을 때리고, 가족사를 들먹이며 모욕한다.

그런데 앤드루는 도망치지 않는다.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연습한다. 왜 그랬을까.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플레처는 앤드루에게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가장 두려운 사람이면서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 존경하던 사람이 자신을 선택했다가 곧바로 "넌 부족하다"고 선언했다. 앤드루에겐 숙제가 생긴다.

'저 사람이 나를 선택했던 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플레처의 인정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칭찬했다가 깎아내리고, 자리를 줬다가 빼앗는다. 다른 드러머들과 끊임없이 경쟁시킨다. 앤드루는 점점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플레처의 표정과 손짓이 성적표가 된다.

처음에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플레처에게 인정받기 위해 위대한 드러머가 되어야 한다.

자기결정성 이론에서는 인간이 건강하게 동기를 유지하려면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반대로 위협과 처벌, 과도한 압박을 사용하는 통제적 환경은 심리적 욕구의 좌절이나 번아웃과 연결될 수 있다.

압박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경쟁도, 평가도,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사람을 움직인다. 플레처는 그 지점을 집요하게 찌른다. 압박이 강해질수록 끝없이 강해진다면 좋겠지만, 불안은 집중력을 갉아먹고 지나친 긴장은 수행을 방해한다. 그렇게 낙오자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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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플레처의 논리는 놀랍도록 편리하다. 잘하면 자신이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못하면 애초에 위대해질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의 교육법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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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더 무서운 변화는 플레처가 없는 곳에서 벌어진다. 앤드루는 호감 상대 니콜과 헤어진다. 연애가 자신의 성공을 방해할 것이라고 미리 결론 내린다. 가족과 식사할 때는 친척의 성취를 자신의 음악적 성취와 비교하며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급기야 공연장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피투성이가 된 채 무대로 향한다.

플레처가 옆에서 "더 해"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스스로 같은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앤드루 안에 작은 플레처가 생겼다.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그렇다면 플레처는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영화 후반부 그는 자신의 교육 철학을 설명한다. 젊은 찰리 파커가 공연에서 실수했다가 조 존스에게 심벌즈를 얻어맞고 망신당한 뒤 죽도록 연습해 위대한 연주자가 됐다는 이야기. 플레처는 자신도 그런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학생에게 "잘했다"고 쉽게 말해 만족시키는 것보다 한계 너머까지 몰아붙여 다음 찰리 파커를 찾아내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다.

플레처는 학생을 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학생의 잠재력을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사람은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상대를 위한다는 믿음 속에서 모욕은 폭력이 아니라 자극이 되고, 공포는 학대가 아니라 동기부여가 된다. 견디지 못한 학생은 피해자가 아니라 재능이 부족했던 학생이 된다. 학생 한 명의 고통과 인류가 잃어버릴지 모르는 찰리 파커를 저울에 올려놓으면 자신의 행동은 얼마든지 숭고해질 수 있다.

그 믿음을 흔들 만한 사건은 있었다. 옛 제자 숀 케이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생전에 불안과 우울을 겪었다는 소식이다. 영화는 그의 죽음에 플레처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확정하지 않는다. 분명한 건 플레처가 그 뒤에도 교육 철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원하는 건 모든 학생의 성장과 행복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찰리 파커다. 이 논리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만 보인다. 열 명을 몰아붙여 아홉 명이 무너지고 한 명이 성공하면, 그 한 명을 가리키며 "봐, 하면 되잖아"라고 말할 수 있다. 사라진 아홉 명은 성공담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플레처에게 너무나 위험한 증거 하나를 선물한다. 앤드루다.

플레처는 공연 직전 앤드루가 모르는 곡을 연주하게 해 그를 망신시킨다. 앤드루는 무대에서 내려간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다. 플레처의 지휘를 무시하고 '캐러밴'을 시작한다. 밴드가 따라붙고, 앤드루는 폭발적인 드럼 솔로를 쏟아낸다.

플레처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번진다. 앤드루가 그토록 원했던 표정.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그래서 '위플래쉬'의 마지막은 황홀하면서도 불편하다. 플레처가 옳았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의자를 던지고, 모욕하고, 경쟁시키고, 끝까지 몰아붙였다. 앤드루는 피를 흘리고 연인을 밀어냈고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연주했다. 그리고 결국 엄청난 연주를 해낸다.

플레처라면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거봐.'

이때 결과편향과 생존자 편향이라는 심리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결과가 좋으면 그 결과에 앞서 있었던 선택까지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을 보며 그가 견뎌낸 고통까지 성공의 필수조건으로 묶는다.

하지만 마지막 연주가 플레처의 교육법이 옳았다는 실험 결과는 아니다. 비교할 앤드루가 없기 때문이다. 모욕당하지 않은 앤드루가 어디까지 성장했을지, 존중받으며 훈련한 앤드루가 어떤 연주자가 됐을지는 알 수 없다. 플레처 때문에 저 연주가 나온 것인지, 플레처에게 그렇게까지 시달리고도 저 연주가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지 못한 낙오자들의 가능성도 알 수 없다. 플레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만한 심리적 고통을 겪지 않고도 더 뛰어난 연주자로 성장했을 사람이 있었을지 모른다. 플레처의 방식은 성공한 한 사람만 보여줄 뿐, 그 과정에서 사라진 가능성까지 증명해주진 않는다.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현실에서도 비슷한 말을 듣는다.

"나도 그렇게 배워서 성공했어."
"그때 그렇게 혼났으니까 사람이 된 거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받은 모든 상처를 필요조건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플레처가 무서운 이유는 화를 잘 내서가 아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 때문이다. 자신만큼 학생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없다는 확신, 그래서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확신. 그리고 앤드루의 눈부신 연주는 그 믿음에 마지막 증거까지 쥐여준다.

플레처도 웃고 앤드루도 웃는다. 평생 받고 싶었던 인정이 마침내 도착했으니. 두 사람은 드디어 같은 템포에 올라선다. 통제한 사람과 통제를 내면화한 사람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순간이다.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영화 '위플래시' 스틸컷 [사진=IMDB]

마음이 썩 개운치는 않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건 앤드루가 위대한 연주자가 됐는지가 아닐 것이다. 그 위대함을 위해, 어디까지 망가져도 괜찮았는지다.

영화가 끝나면 그 질문만 슬며시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붙이고 있나. 혹은 조금 힘들어졌다는 이유로, 너무 일찍 멈추고 있나. 어디까지가 견뎌야 할 고통이고, 어디서부터가 나를 망가뜨리는 파괴인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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