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경계 안에서 건네는 도움이고, 희생은 경계 밖으로 넘어가 타인의 삶을 관리하려는 오만이다.
불편한 문장이다. 우리는 보통 희생을 이타심의 가장 숭고한 형태로 배운다. 많이 참는 사람, 많이 이해하는 사람, 자신의 몫을 내어주는 이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영화 '도그빌'의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도 그런 사람이다.
갱스터들에게 쫓기던 그레이스는 미국 로키산맥의 외딴 마을 도그빌에 숨어든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를 경계한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받아달라는 대가로 집안일을 돕고 아이들을 돌보고 밭일을 한다.
호의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레이스의 처지를 알게 된 주민들은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고 급기야 폭력과 성착취까지 가한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목에는 쇠사슬도 채운다. 그런데도 그레이스는 좀처럼 이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늘 이유가 있다.
'가난해서 그럴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 있다.'
어떤 행동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이나 능력에서 찾는 것을 내적 귀인(Internal Attribution), 환경과 상황에서 찾는 것을 외적 귀인(External Attribut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못된 인간"이라며 쉽게 성격 탓으로 돌리지만, 그레이스는 정반대다. 주민들의 행동을 상황으로 설명하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다.
그레이스의 관용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쉽게 심판하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도망쳐왔다. 그렇다면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곧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이었을 테다. 아버지가 심판한다면 자신은 이해하고, 아버지가 처벌한다면 자신은 용서하는 식이다.
사람은 때로 자신이 혐오하는 모습을 닮지 않기 위해 반대편으로 지나치게 기운다. '나는 저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강해질수록 분노와 거절, 상대에게 책임을 묻는 일까지 나쁜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상을 지키려는 패턴, 흔히 말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맞닿는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견디지 못할 때, 그 마음은 자신을 옥죌 수 있다. '나는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상을 지키는 일이 중요해지고, 용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는 일이 된다.
그레이스에게 필요했던 것도 폭력이 아니라 경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심판과 책임을, 공격성과 자기주장을 구분하지 못한다.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려던 사람은 결국 모두를 심판하는 사람이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어쩌면 용서와 처벌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사라져버린 문장인지도 모른다.
'당신을 이해하지만, 당신의 행동까지 허용하는 건 아니다.'
가난이 착취를 설명할 순 있어도 착취를 없던 일로 만들진 않는다. 성장환경이 폭력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순 있어도 피해자가 받은 폭력의 책임까지 지우진 못한다.
영화 말미 그레이스를 찾아온 아버지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한다. 딸이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도덕적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한다는 것. 자신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용서하지 못했을 일을, 주민들에게는 환경과 처지를 이유로 계속 용서한다고 꼬집는다.
아버지는 그것을 관용이 아니라 오만이라고 부른다.
'나는 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은 못할 것이다.'
'내게는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저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으니 이해해줘야 한다.'
끝없이 이해해주는 마음의 밑바닥에 이런 전제가 숨어 있다면 관계에는 위계가 생긴다. 그레이스 역시 주민들을 자신과 똑같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성인으로 보는 대신, 본능과 환경에 끌려다니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이스의 태도는 자기희생 도식(Self-Sacrifice Schema)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살펴야 했던 환경에서 흔히 형성되는 심리 패턴이다. 부모의 기분을 살피며 자랐거나 아픈 형제, 까다로운 보호자를 돌보면서 일찍이 '내가 챙겨야 한다'는 역할을 맡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크게 느끼는 민감성도 영향을 미친다. 그레이스 역시 자신의 고통보다 주민들의 사정을 먼저 헤아린다. 그렇게 선의는 자기 파괴와 가까워진다.
비슷한 문제를 바버라 오클리는 병리적 이타주의(Pathological Altruism)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타인을 돕겠다는 의도나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이 결과적으로 대상이나 자신, 혹은 사회에 해를 끼치는 현상이다. 좋은 의도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도그빌'에서도 그레이스의 용서는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요구는 점점 커지고 노동은 착취가, 착취는 폭력이 된다.
배려받는 사람이 반드시 의존적으로 변하거나 악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상대가 잘못할 때마다 그 사정을 이해해주고, 책임까지 덜어주는 일이 반복된다면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건 정말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일까.
도움에도 차이가 있다.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방법과 도구를 건네줄 수도 있고, 문제의 해결책 자체를 대신 마련해줄 수도 있다. 이를 각각 '자율성 지향적 도움'과 '의존성 지향적 도움'이라고 한다. 상대에게 계속 물고기를 가져다주는 것과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의 차이다.
겉으로는 모두 도움이지만 전자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후자는 문제를 해결할 힘을 남겨준다.
그래서 배려와 희생도 '얼마나 많이 주는지'로 나눌 수 없다. 도움 이후 상대에게 무엇이 남는지가 중요하다.
배려에는 상대의 몫이 남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준 뒤 선택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상대에게 돌려준다.
경계 없는 희생은 상대의 몫까지 가져온다. 상대가 불편할까 봐 대신 결정하고, 실패할까 봐 결과를 대신 떠안고, 상처받을까 봐 잘못까지 설명해준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만나기도 한다.
존중은 좋은 대우만 해주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실수할 자유도, 선택할 자유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능력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도그빌'은 여기서 한 번 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인 그레이스는 마침내 자신을 학대한 주민들을 심판한다. 그가 찾아낸 답은 건강한 경계가 아니다.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자신을 배신한 톰 역시 직접 살해한다. 무한한 용서의 반대편에 무한한 응징이 놓인다.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용서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들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판단한다. 하나는 끝없는 면책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심판이지만, 두 태도 모두 자신을 타인의 위에 세운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묘한 우월감이다.
처음부터 경계를 세웠다면 끝없이 눈감아줄 일도, 마지막에 모든 것을 불태우며 응징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도그빌'은 결국 묻는 듯하다.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지금 당신은 배려하고 있는가, 희생하고 있는가. 당신이 베풀고 용서하는 만큼, 사람들은 당신을 걸맞게 대우하고 있는가. 당신의 도움은 자율을 남기는가, 결핍을 메우기 위한 관리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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