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목마, 항구를 통해 들어온다
보고서 표지엔 트로이의 목마 이미지가 실려 있다. 상징이 아니라 경고다. 미국이 묻는 건 하나다. "당신네 항구를 통해 들어온 게 정말 당신네 것이 맞냐?"
방식은 크게 두 가지란다. 하나는 생산형 환적이다. 중국산 부품을 제3국으로 가져와 나사 몇 개 조이고, 스티커 바꾸고, '현지산'으로 재포장해 수출한다. 보고서는 이런 공장을 'screwdriver factory', 즉 나사돌리기 공장이라고 냉소적으로 부른다. 다른 하나는 물류형 환적이다. 물건은 안 바뀌는데 서류가 먼저 변한다. 보고서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Paperwork changed faster than the product did." 서류가 상품보다 더 빨리 바뀐다. 참 뼈 때리는 문장이다.
한국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다
보고서는 40여 개국을 세 등급으로 나눈다. 한국은 1등급, 이른바 '1등급(Tier 1) 즉 대규모 수입이 진행되는 리더국‘ 그룹이다. 캐나다, 일본, 대만과 같은 칸이다. 이게 칭찬처럼 들리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보고서는 한국 경기 반도체 벨트를 집적회로의 '우회 경로(conduit)'가 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실제 적발 사례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한 의심 경로'로 공식 문서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신호다. 실제 조사 집행 기록에도 한국이 등장한 적이 있다. 미국 CBP는 올해 1월부터 8월 사이 EAPA(반덤핑·상계관세 회피 조사) 관련 조사에서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함께 한국을 경유한 중국계 우회 네트워크를 적발했다.
단순 환적국인 캄보디아나 파나마는 "재포장과 라벨링"이 문제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은 "깊은 공급망" 문제다. 중국에서 중간재를 들여와 가공하고, 미국에 파는 구조 자체가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묻는 질문은 이제 달라졌다. "한국에서 만들었냐"가 아니라 "한국에서 무엇을 얼마나 바꿨냐"를 캐묻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응은 이미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월 행정명령 14411호를 발동해 수입자 등록 요건을 강화하고, 실소유주 공개와 공급망 정보 제출을 의무화했다. 미국 세관국경보호청(CBP)은 반덤핑·상계관세 회피 조사 도구인 EAPA를 동원해 올해만 4억 달러 이상의 미납관세를 적발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고서가 가장 야심 차게 내세우는 건 이른바 'AI 탐정 국경'이다. 선적 데이터, 항로, 위성사진, 컨테이너 이미지, 소유 관계까지 한꺼번에 분석해 수상한 패턴을 잡아내겠다는 구상이다. 예전 세관이 확대경을 든 형사였다면, 앞으로는 CCTV·금융추적·AI를 동시에 구사하는 디지털 형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서류 장난으로 먹고살던 시대는 이제 진짜 끝나가고 있다.
위기도 있고 기회도 있다 — 답은 '투명성'이다
한국이 선택할 길은 하나다. 억울하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다.
기업은 부품별 자재명세서(BOM)를 정교하게 관리하고, 제조공정 기록과 설비능력 자료를 쌓아야 한다. 미국 세관의 사전판정(advance ruling)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앞으로 원산지 관리는 재무회계 수준으로 다뤄야 한다. 감(感)으로 버티는 시대는 끝났다.
한국에 들어오는 중국 자본에도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 포장·라벨링 중심의 투자라면 미국의 의심만 키운다. 반도체 소재, 배터리 부품, 전장 부품처럼 실제 생산과 기술이전, 고용을 동반한 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은 우회수출용 스티커 공장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제조 파트너라는 점을 중국 기업들에게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건 우리 산업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미국이 싫어하는 건 불투명성이고, 원하는 건 검증 가능한 신뢰다. 한국이 그 신뢰를 먼저 확보한다면 공급망 재편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무역은 바다를 헤치는 항해와 같다. 파도가 센 날엔 작은 배가 먼저 흔들리지만, 항로를 아는 배는 끝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공포가 아니라 정확한 항해술이다.
[작성자 주] 본 기고는 2026년 8월 13일 미국 백악관이 공개한 정책 보고서 『The Great Transshipment Scam』의 분석을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필자 이력
▲한중경제연구소 대표(현) ▲ 국립외교원 연구원 ▲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 ▲ 코트라 중국조사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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