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적인 폭염에 지난 7일 최대전력 수요가 95.321GW로 올여름 최대치를 기록했다. 역대 다섯 번째 규모다. 공급예비율은 9%로 통상 안정적인 수준으로 보는 10% 아래로 떨어졌다.
당장 올해에 국한된 어려움이 아니다. 기후변화가 진행되면서 폭염과 열대야는 갈수록 빈번하고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올해 유난히 더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간 반복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이라는 의미다. 전력 수요가 가장 높은 시기에 폭염이 겹치는 상황이 새로운 일상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AI)과 첨단 제조업의 전력 수요까지 빠르게 느는 추세다. 과거의 평균적인 수요가 아니라 극한 기후와 산업 구조 변화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전력망 재설계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전력량이 부족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압과 주파수의 안정성, 정전 가능성, 전력 품질까지 기업의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AI 경쟁력이 전력 경쟁력과 직결되는 이유다.
국가 전력망의 공간적 구조를 바꿔야 한다. 지금은 대규모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 등 소비지로 보내는 중앙집중형 구조에 가깝다. 수도권에 집중된 전력 수요를 지역으로 분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산업단지를 전력 생산 여건이 좋은 지역에 배치하고, 발전원과 산업단지를 묶어 개발하는 방식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지역 균형발전과 전력망 안정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산업단지 입지를 결정할 때 토지와 용수, 교통뿐 아니라 20년 뒤 확보 가능한 전력량과 송전망을 핵심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전력망의 유연성도 높여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 등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질수록 전력 생산량의 시간대별 편차가 커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ESS를 확대하고, 수요반응(DR)과 스마트그리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전기를 많이 생산할 때 저장하고 수요가 급증하는 시간대에 꺼내 쓰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전기차와 산업용 설비까지 전력망과 연결하면 소비자도 전력 수급 조절에 참여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송전망은 장기 수요를 먼저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주민 수용성과 인허가 문제를 풀기 위한 제도 개선은 필수다. 전력망을 국가 핵심 인프라로 규정하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신속하게 조정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발전원 구성 역시 원전과 재생에너지, 가스발전, ESS 등 각각의 장점을 조합해 안정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만큼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다. 국가 산업정책과 전력정책을 따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정부는 올여름 충분한 공급 능력과 추가 예비자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올해 여름을 무사히 넘기는 것과 앞으로 수십 년의 전력 수요에 대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폭염이 반복되고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최대전력 수요가 새로운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전력망은 한 번 구축하면 수십 년을 사용하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기후변화와 AI를 지금 필요한 것은 올해 위기를 넘길 임시 처방이 아니라 기후변화와 산업 대전환을 견딜 수 있는 국가 전력 공급망을 다시 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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