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간판은 달라도 사기의 설계도는 같다

박승호 탐사보도팀 기자
박승호 탐사보도팀 기자

현장을 들여다볼 때마다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전세사기부터 소상공인을 노린 광고사기, 세입자 보증금을 밑천 삼은 수백억대 빚더미 사업에 이르기까지 범죄의 양상은 다양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이름과 피해액의 크기만 다를 뿐, 그 내면에 깔려 있는 설계도는 같았다.

사기꾼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름 빌리기'다. 자본금 1000만원짜리 깡통 법인은 국토교통부 소관 법정단체 이름을 내세워 세입자를 모았고 그렇게 모은 100억원의 보증금을 더 큰 빚을 내기 위한 밑천으로 쓰고 파산했다. 포털 광고대행 사기는 전화 첫마디부터 "네이버 공식 파트너"를 내세웠고, 허위매물은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의 이름 뒤에 숨어 사람들을 현장으로 유인했다. 공신력의 이름을 빌려 타인의 경계심부터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건 껍데기뿐인 이들에게 남의 이름은 손쉽게 사익을 챙기는 무기가 된다.

다음은 표적 선정이다. 취재했던 전세사기 피해자 명단에는 외국인 세입자가 여럿 포함돼 있었고, 광고사기의 표적은 막 사업자등록을 마친 초보 자영업자들이었다. 부동산 앱의 허위매물에 속아 일주일간 찜질방을 전전한 건 20대 사회초년생이었다. 모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기엔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법적 절차를 잘 모르거나, 당장 소송을 감당할 여유가 없거나, 신고해 봐야 달라질 게 없다고 체념하곤 했다. "신고나 고소를 쉽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기꾼들의 계산은 비열하리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마지막 수순은 간단하다. 잠적과 파국이다. 폰지사기처럼 새 피해자들의 돈으로 앞선 구멍을 메우거나 또 다른 빚더미 사업을 벌이며 버티다가 한계에 이르면 폐업 후 유유히 사라진다. 자본금 1000만원짜리 껍데기 법인이 문을 닫고 나면 강제집행을 하고 싶어도 남아있는 재산조차 없다. 민사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문을 손에 쥐어도 피해자들에게 돌아오는 결론은 늘 같았다. "상대방의 변제 능력이 없어 피해 회복은 기약이 없다"는 허탈한 현실이다.

문제는 이 메커니즘의 끝에 작동해야 할 사법 처벌마저 사기꾼들에게는 '남는 장사'로 계산된다는 점이다. 설령 실형을 받고 교도소에 다녀온다 해도 숨겨둔 돈은 그대로다.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는 대가로 평생 벌어도 못 만질 돈을 손에 넣는다면, 복역은 처벌이 아니라 자본 획득을 위한 비용일 뿐이다.

처벌이 억제력을 잃은 자리에서 이들의 다음 행보는 뻔하다. 간판만 바꾸는 것이다. 허위매물로 민원이 쌓인 중개사무소는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지면 가처분을 신청하고 기존 인력을 새 사업자로 옮겨 상호를 바꾼 뒤 곧바로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이어간다. 포털사이트를 사칭한 광고대행 업체들 역시 수사기관이나 행정 당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폐업 후 이름을 바꿔 다시 영업을 재개한다. 이를 제지할 법과 제도의 공백 속에서 상호만 갈아치운 사기 행각은 손쉽게 반복된다.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들의 말은 늘 닮아 있었다. "협회 마크가 있어서 믿었다", "광고비가 0원이라고 해서"라는 탄식 뒤에는 공통된 절망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원망해 본들 빼앗긴 삶과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사기는 개인이 운이 나빠 걸리는 불운이 아니다. 공신력의 허점을 빌리고, 약자의 절박함을 연료 삼아 설계된 구조적 범죄다.

간판은 바뀌어도 사기의 설계도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악순환의 메커니즘을 끊어내지 못하는 한, 다음 피해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전화를 받고 있을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