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안전자산 신화 깨진 엔화

'안전자산'이라는 말은 경제와 금융시장이 불안할수록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전쟁이나 금융위기, 경기침체가 닥치면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을 팔고 가치가 안정적인 자산으로 몰린다. 미국 달러와 금, 스위스프랑, 그리고 일본 엔화는 오랫동안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혀 왔다. 특히 엔화는 일본 경제의 막대한 대외 순자산과 풍부한 자금력, 정치·사회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나타난 엔화의 모습은 과거의 명성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최근 엔화 급락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 공조 개입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일 양국이 엔화 방어를 위해 공동으로 시장에 개입한 것은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이후 처음이다. 달러당 160엔을 돌파하며 가치가 40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엔화는 공조 개입 이후 다소 안정을 되찾았지만, 세계 4위 경제대국의 통화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엔화 약세를 단순히 미·일 금리 차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금리차가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맞지만, 그 배경에는 일본 경제가 수십년 동안 쌓아온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장기 저성장과 디플레이션,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부채,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고령화, 장기간 이어진 초저금리 정책, 그리고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인공지능(AI) 혁명 속에서 상대적으로 둔화된 산업 경쟁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엔화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었다. 과거에는 세계 경제에 위기가 닥치면 엔화 가치가 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이제는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져도 엔화가 오히려 약세를 보이는 장면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안전자산'이라는 이름도 결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뒷받침될 때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엔화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반면 최근 중국 위안화의 움직임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지난달 위안화 환율은 달러당 6.8위안 아래로 내려가며 3년 반 만에 가장 높은 가치를 기록했다. 중국 역시 부동산 침체와 소비 부진, 미국과의 전략 경쟁이라는 적지 않은 악재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경공업은 물론 전기차와 배터리, 반도체, 조선, 우주항공 등 첨단 산업까지 아우르며 확보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이 호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위안화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물론 중국 정부의 외환시장 관리와 자본 통제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야 하지만, 산업 경쟁력이 통화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 같은 엔화와 위안화의 엇갈린 흐름은 한국에게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환율은 단순히 금리 차이나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성장 잠재력과 산업 경쟁력, 재정 건전성, 미래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종합적으로 반영되는 결과물이다. 외환보유액을 늘리고 환율을 방어하는 것은 일시적인 처방이 될 수는 있어도 통화의 신뢰 자체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시장은 경제의 펀더멘털을 보고 통화를 평가한다. 지난달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 발행을 계기로 원화 강세가 나타난 것도 산업 경쟁력이 통화 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한국 역시 저출산과 고령화, 잠재성장률 하락이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동시에 AI와 반도체,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 차세대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엔화의 추락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통화의 신뢰는 경제의 신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경고장이다. 안전자산의 지위도, 강한 통화도 결국은 튼튼한 산업 경쟁력과 지속 가능한 성장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성원 국제경제팀장
장성원 국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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