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챕터를 마무리한 뒤에도 마블의 세계는 끝이 날 줄 몰랐으니 시리즈는 계속 이어졌다. 다만 워낙 큰 판이 마무리된 이후였으므로 ‘블랙 위도우’, ‘샹치’, ‘이터널스’,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 등 충분히 즐길거리가 많은 마블 영화들이 과거 명성만큼의 반응을 이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마블은 마블이다.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제작비를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제작사가 또 있겠는가. 다음에 이어질 또다른 광대한 챕터의 군불을 떼는 준비 기간이라고 친다면 이 소소한 반응은 점점 증폭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등장인물들이 또다른 지구의 평행세계로 떨어지며,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MCU에 대한 기대도 땅에 떨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또다른 지구는 838이라는 고유숫자가 붙었고 지구-838에 ‘캡틴 카터’가 등장하면서부터 앞으로 이어질 마블의 새 챕터는 전혀 흥미롭지 않을 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예감했다. 아마도 이미 죽어 장례식도 치른 아이언맨을 또다른 평행세계의 지구에서 데려올 수도 있겠다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으니, 2024년 7월 27일(현지시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코믹콘’ 행사에서 닥터 둠의 정체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임이 공개되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MCU 복귀는 마블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나 동시에 우려와 씁쓸함이 따라붙는다. “I am IronMan”이라는 선언과 시작된 아이언맨의 탄생과, 역시 “I am IronMan”이라고 말한 후 이어진 아이언맨의 죽음이 히어로의 죽음으로서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닥터 둠’으로 분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 이상의 뭘 더 보여줄 수 있을지 당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어벤져스:엔드게임’ 이후 벌써 7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마블표 영화와 드라마는 끊이지 않고 공개됐지만 이렇다 할 인상적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제 MCU는 끝난 것 아니냐는 탄식과 낙담이 첩첩이 쌓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어벤져스:둠스데이’의 티저 예고편이 20일 공개됐고, 영상은 썬더볼츠의 ‘짝퉁 어벤져스’와 ‘판타스틱 4’ 멤버들까지 포함해 30여명이 넘는 거대 캐스트가 꽉 채워졌다. 도대체 지구에 또 어떤 위기가 닥쳤길래 MCU 주요 캐스트가 거의 총출동해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올해 12월 찾아올 ‘둠스데이’는 총 제작비가 7억 달러로 알려졌는데 한국 돈으로 1조가 넘는 액수다. 할리우드 자본력의 총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이 어마무시한 영화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마블의 사정이다. 필자는 다만 MCU의 세계가 과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를 따지고 싶을 뿐이다.
히어로라 함은 물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인기를 얻고 사랑을 받는다. 어떤 적이라도 결국은 물리쳐내는 것이 히어로의 사명이자 숙명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능력은 일반 관객에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재료가 돼 준다.
그런데 히어로물이 이토록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 히어로가 ‘전지전능’ 완벽한 능력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히어로일수록 반드시 약점이 있고 내면의 상처가 있으며 인간적으로 나약한 면도 갖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저가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알려줬듯 이 세상을 구하는 일은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단 한 개의 해결책만 있을 정도로 어렵고 요원한 것이다. 그 해결책은 아이언맨과 블랙위도우의 죽음을 담보해야 할 정도니 얼마나 절박하고 비장한가.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설정이 MCU 세계관에 흘러들어온 이상 예전처럼 단 한 개의 선택에 모든 희망을 걸고 죽음까지 내놓으며 절박하게 싸울 필요가 없다.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 속 평행세계 지구에 붙은 숫자가 838이니 '유사 지구'가 이 광활한 우주에 적어도 800개는 넘게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수백명의 아이언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금 지구와 비슷한 지구가 멀티버스 세계에서는 몇만 개, 아니면 몇십만 개가 더 있는지 도대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선택지가 수천, 수만개,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것은 앞으로 있을 히어로들의 활약에 긴장감을 삭제시킨 꼴이 됐다. 그 어떤 위기가 닥쳐도 관객들은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 지구-102520에서 아이언맨을 또 데려오면 되니까.
MCU가 시리즈의 무대를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설정을 들여왔는데 그 중 ‘시간여행’이 있다. ‘양자 영역’이라는 해괴한 이론으로 간신히 시간여행을 성공시킨 덕분에 결국 어벤져스는 타노스를 이길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이때의 시간여행은 어쨌든 정해진 ‘핌’ 입자 개수라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스토리상으로는 멀티버스로의 이동은 정확한 범위가 딱 정해지지 않았고 작품마다 다른 잣대로 적용되고 있어 그 기준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아메리카 차베스의 멀티버스 이동 능력 역시 아직 그 한계가 알려지지 않았으며 차베스 스스로조차 정확한 능력치를 깨닫지 못한 상태다. 그러니까 현 시점 MCU에서 멀티버스는 ‘스켈레톤 키’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둠스데이’의 예고편을 봐도 설레지 않는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쳐도 ‘만능 열쇠’인 멀티버스의 세계관을 MCU가 감히 취해버린 한, 서사의 긴장감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블랙위도우가 돌아와도 반갑지 않을 것 같다. 수많은 아이언맨,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존재한다고 인지한 상태라면 도대체 이 캐릭터는 왜 특별한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멀티버스는 MCU에 무한한 상상력과 확장 가능성을 준 대신, 그동안 세계관을 지탱한 서사의 원칙을 흔드는 양날의 검이 됐다. 무한한 가능성을 전제로 한 세계에서는 무엇이 특별한지, 무엇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올해 연말 최대의 화제작이 될 ‘어벤져스:둠스데이’에 무슨 이야기가 담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결국 MCU는 얼마나 많은 우주를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여전히 단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선택이 중요하게끔 관객이 느끼도록 해야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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