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언제나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꿔왔다. 1970년대 오일쇼크는 에너지 절약과 연비 경쟁을 촉발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에너지 안보 전략을 뒤흔들었다. 최근 중동 지역의 무력 충돌 장기화 역시 또 다른 변곡점을 만들고 있다. 국제유가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질 때마다 급등락을 반복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비롯한 원유 공급망 불안도 상시화하는 모습이다. 당장의 충격은 유가 상승이지만 더 큰 변화는 세계 산업의 화석연료 의존도 축소 움직임이다.
전기차 전환도 같은 흐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기차 보급은 지금까지 탄소중립 정책과 환경 규제가 주도했다. 앞으로는 에너지 안보가 더욱 중요한 동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석유 가격과 공급망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전동화를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다.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이 하나의 과제로 결합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대 수혜국은 중국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 전기차는 값싼 저가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지금은 다르다. 배터리, 희토류, 모터, 전력반도체, 소프트웨어까지 전기차 공급망 전반을 사실상 자국 중심으로 구축했다. 세계 최대 배터리 업체 CATL은 기술력과 생산능력에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BYD는 순수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합쳐 세계 최대 판매 기업으로 성장했다.
중국 정부의 장기간 산업 육성과 거대한 내수시장이 결합하면서 규모의 경제까지 확보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카 경쟁에서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중국 시장을 겨냥해 현지 기업과 협력을 확대하는 이유다.
반면 유럽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수요 둔화와 비용 부담으로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고, 일본 업체들도 투자 전략을 재조정하고 있다. 미국은 관세와 보조금 정책으로 자국 산업 보호에 집중하지만 가격 경쟁력에서는 중국과 견줄 바가 아니다. 중동발 에너지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격차는 더 벌어질 공산이 크다.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 전기차와 배터리,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분야에서 중국보다 경쟁 우위라고 자신하기 어렵다. 세계 시장의 무게 중심이 바뀌는 상황에서 기존 성공 방정식으로는 지속 성장이 쉽지 않다.
전기차를 단순한 자동차 산업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AI 산업이 결합된 국가 전략산업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차세대 배터리와 전력반도체, 차량용 AI 반도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충전 인프라까지 전후방 산업을 함께 육성해야 한다. 특히 반도체와 배터리에서 축적한 제조 경쟁력을 AI 기반 모빌리티로 확장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이자 공급망 중심인 중국과는 경쟁할 분야와 협력할 분야를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배터리 소재와 핵심 광물, 충전 인프라, 자율주행 기술 등에서는 실용적인 협력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산업이 공급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진영 논리만으로는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어렵다.
중동 전쟁은 국제유가를 흔들고 있지만 그 파장은 에너지 시장을 넘어 자동차 산업의 미래까지 바꾸고 있다. 석유 시대의 불안은 전기차 시대를 앞당기는 촉매로 작용 중이다. 우리나라가 제조 강국의 저력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할 만한 경쟁력을 확보한다면 미래 모빌리티 시장 주도권 쟁탈전에 감히 출사표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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