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담] 우승보다 값진 하루, 한국 골프가 증명한 경쟁력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네 번째 메이저 대회인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총상금 910만 달러 정상에 오른 유해란왼쪽과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제네시스 스코틀랜드 오픈총상금 900만 달러 정상에 오른 김주형 사진연합뉴스·로이터 PGA 투어 엑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 정상에 오른 유해란(왼쪽)과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제네시스 스코틀랜드 오픈 정상에 오른 김주형 [사진=연합뉴스·로이터, PGA 투어 엑스]

스포츠를 오래 지켜보다 보면 유난히 기억에 남는 날이 있다. 우승 횟수보다 그 승리가 품은 의미와 여운이 오래 남는 날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간)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유해란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김주형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제네시스 스코틀랜드 오픈 정상에 섰다. 한국 남녀 선수가 같은 날 PGA와 LPGA 투어에서 나란히 우승한 것은 2021년 10월 고진영과 임성재 이후 통산 두 번째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총출동한 권위 있는 무대에서 거둔 동반 우승이라는 점에서 의미는 더욱 크다.

유해란의 우승은 기록만으로도 특별했다. 직전 메이저 대회인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 이어 에비앙 챔피언십까지 제패하며 메이저 2연승을 달성했다. 한국 선수로는 박세리, 박인비, 고진영에 이어 네 번째로 한 시즌 메이저 2승을 기록했고, 한국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것도 박인비 이후 13년 만이다.

기록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 보여준 위기관리 능력이었다. 3라운드에서 남녀 메이저 대회를 통틀어 역대 최저타인 11언더파 60타를 작성했던 유해란은 최종일에는 좀처럼 버디 퍼트가 떨어지지 않았다. 선두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리듬을 잃지 않았다.

브룩 헨더슨(캐나다)은 홀인원 1개와 이글 2개를 앞세워 무섭게 따라붙었다. 18번 홀 버디로 최종합계 19언더파를 기록하며 먼저 경기를 마치자, 한 타 뒤져 있던 유해란에게는 마지막 홀 버디가 반드시 필요했다.

유해란은 침착했다. 세 번째 샷으로 버디 기회를 만든 뒤 이날 내내 말을 듣지 않던 퍼터로 가장 중요한 순간 버디를 잡아냈다.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간 결정적인 퍼트였다. 같은 18번 홀에서 이어진 첫 연장전에서도 다시 버디를 성공시키며 파에 그친 헨더슨을 따돌렸다. 최고의 샷 감각을 보여준 날은 아니었지만, 가장 필요한 순간 가장 강한 선수가 됐다.

같은 날 스코틀랜드 르네상스 클럽에서는 김주형이 긴 부진의 터널을 마침내 빠져나왔다. 2023년 10월 슈라이너스 칠드런스 오픈 이후 2년 9개월 동안 이어진 PGA 투어 무승을 끝냈다.

한때 세계 골프를 이끌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았지만 이후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26개 대회에 출전해 9차례 컷 탈락했고, 톱10 진입도 한 차례뿐이었다. 지난 6월 US오픈 단독 3위로 반등의 조짐을 보였지만, 단 한 번의 성적만으로 부활을 단정하기에는 이르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김주형은 최종 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 6개를 몰아치며 경쟁자들을 따돌렸고, 2타 차 우승으로 긴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었다. 경기 직후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흘린 눈물에는 부진을 견뎌낸 시간과 다시 정상에 섰다는 안도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번 우승은 한국 선수 최초의 제네시스 스코틀랜드 오픈 제패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이 대회는 메이저는 아니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메이저 대회인 디오픈을 앞두고 정상급 선수들이 링크스 코스 적응을 위해 총출동하는 대표적인 전초전이다. 2022년부터는 PGA 투어와 DP월드투어가 공동 주관하면서 대회의 경쟁력도 한층 높아졌다.

올해 역시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김주형은 그 두터운 선수층을 뚫고 정상에 올랐다. 단순히 우승 하나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다시 세계 정상권 경쟁자로 돌아왔음을 증명한 값진 성과였다.

유해란은 메이저 2연승으로 한국 여자골프의 저력을 다시 보여줬고, 김주형은 긴 침묵을 깨고 한국 남자골프의 희망을 되살렸다. 우승 트로피는 두 개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한 숫자 이상이었다.

한국 골프는 오랫동안 세계 정상과 경쟁해 왔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세대교체와 부진이 겹치며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 시점에 남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같은 날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스포츠에는 때때로 한 번의 승리가 한 종목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는 순간이 있다. 이번 동반 우승이 바로 그런 하루로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한국 골프의 경쟁력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세계 무대에서 다시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시켜 준 값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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