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21일(현지시간) 스위스에서 종전 양해각서(MOU) 서명 이후 첫 대면 협상을 가졌다. 중재국인 카타르와 파키스탄이 협상 종료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 따르면, 양측은 안전한 호르무즈 해협 통행과 레바논 내 충돌 방지를 위한 협의 메커니즘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협상의 중심 의제는 단연 레바논이었다. 이란은 전쟁 발발 이후 협상 과정 전반에 걸쳐 중동 내 친이란 세력 '저항의 축' 일원인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쏟아 왔다. 지난주 체결된 종전 MOU 1항에 "레바논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군사작전을 즉각적이고 영구적으로 종료한다"는 문구가 명시된 것이 그 방증으로, 레바논이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전쟁 종식을 못 박은 것이다. 전 세계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 문제와 이란 핵 개발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반면 이란은 레바논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내세우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사실 레바논은 이란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 않은 곳인 만큼 이란이 레바논에 집착하다시피 관심을 갖는 것은 의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란은 레바논 안보 문제, 팔레스타인 정세, 이라크 상황, 그리고 미국과의 협상 과정 전체를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방정식으로 본다. 이란 정부는 '위기의 한 부분만 다루고 다른 불안정 요인을 방치하는 합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 왔다. 이른바 '상호 연결된 안보' 개념이다.
이란의 시각에서 볼 때 헤즈볼라는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지역 억지력 구조의 핵심 기둥이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인해 하마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지금, 헤즈볼라를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를 상쇄시킬 수 있는 균형추 역할을 하는 유일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란은 헤즈볼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을 레바논 내부 문제가 아닌 중동 전체의 세력 균형을 뒤흔드는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이란이 내걸고 있는 레바논 전쟁 종식 조건은 이스라엘을 겨냥한 부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에 처음부터 반대 의사를 표명해 온 이스라엘은 협상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될 때마다 레바논 남부의 헤즈볼라를 상대로 공습을 감행하며 협상에 찬물을 끼얹어 왔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자국 안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이 발발한 지난 2023년 10월부터 헤즈볼라와 교전 중인 가운데 2024년 9월과 올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를 대폭 강화했다. 특히 올해 3월 공세는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암살 이후 헤즈볼라가 약 1년여 만에 이스라엘을 향해 처음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촉발됐다.
미국과 이란 간 첫 대면 협상이 열린 이날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당분간 레바논 남부에 군을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선언하며 군사 행동 가능성을 시사했다. 미국 중동 전문 싱크탱크 타히르 중동정책연구소(TIMEP)의 카림 사피에딘 연구원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전쟁을 멈출 정치적·기술적·경제적 유인이 없다"고 진단했다.
카네기 중동센터의 레바논 전문가 마이클 영 선임 연구원은 이스라엘이 MOU와 미-이란 협상 자체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라며 "협상이 성공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레바논에서 전쟁을 계속하는 방식으로 이를 저지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란이 레바논을 종전 협상의 우선순위로 밀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레바논 변수가 미-이란 협상 전체의 향방을 가를 핵심 고리로 부각하고 있다. 이미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협상 카드를 쥔 이란이 레바논이라는 '꽃놀이패'까지 갖게 된 양상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재차 군사 행동에 나설 경우, 이란은 MOU 1항이 사실상 파기됐다고 주장하며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발을 뺄 명분을 얻게 된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군사 작전을 중단한다면,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 내 영향력을 다시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이란이 크게 불리하지 않은 구도다.
나아가 이란은 레바논이라는 카드를 앞세워 미국과 이스라엘의 틈을 공략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지난주 프랑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와 싸운 기간이 너무 길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면서 레바논 문제 처리 방식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레바논 담당 선임 분석가 데이비드 우드는 "미국은 레바논 문제와 이란 문제를 분리하길 원한다"면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의 양자 휴전안을 이행하도록 압박함으로써 레바논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런 접근 방식은 레바논 국가가 헤즈볼라의 무장 저항 전략 대신 비폭력적 수단으로 영토를 실효 지배하는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싱크탱크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의 로버트 새틀로프 소장은 레바논 매체 디스 이즈 베이루트에 "만약 이란이 레바논에 대한 자국의 주장을 관철시킨다면, 이는 '큰 사탄(미국)'과 '작은 사탄(이스라엘)' 모두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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