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기본·원칙·상식] 투표용지도 모자란 선거, 선관위는 국민 신뢰를 잃고 있다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책임져야 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건이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투표 현장에서 유권자들이 투표용지를 기다려야 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 광진구 등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장시간 대기해야 했다. 일부 투표소는 투표 시간을 밤 10시까지 연장했고, 현장에는 항의하는 시민과 유튜버들까지 몰리면서 혼란이 이어졌다. 선관위의 투표율 집계도 지연됐다. 선관위는 뒤늦게 사과했고 투표용지 인쇄 기준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민이 궁금한 것은 사과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느냐는 점이다.
 
현재 선관위 내부 지침을 보면 지방선거 때는 선거인 수의 50% 이상을 본투표용 투표지로 인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일부 지역 선관위가 이 최소 기준을 사실상 그대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특히 송파구는 선거인 수의 50% 수준만 인쇄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관위는 사전투표율이 높았고 잔여 투표용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물량을 산정했다고 설명한다. 남는 투표용지가 많으면 관리 부담이 커지고 분실이나 유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선거관리기관이 가장 우선해야 할 가치는 잔여 투표용지 감소가 아니라 유권자의 참정권 보장이다. 남는 투표용지를 걱정하다 정작 필요한 투표용지가 부족해졌다면 우선순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2년 대선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 투표 과정에서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이 발생했다. 지난해 조기 대선 사전투표에서는 유권자들이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황당한 장면이 벌어졌다. 국민은 선관위에 정치적 중립성뿐 아니라 전문성과 안정성도 요구한다. 그러나 최근 반복되는 논란은 선관위가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더 우려되는 것은 부정선거 음모론의 확산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미 수년째 선거 불복과 음모론으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다. 물론 이번 사태가 곧바로 부정선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관위의 반복된 실수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신뢰를 잃은 선거관리기관은 어떤 설명을 내놓아도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국민이 선거 결과를 수용하는 이유는 선거 과정 자체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 신뢰가 흔들리면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도 어려워진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지침 개정이 아니다. 중앙선관위는 왜 최소 기준만 적용했는지, 누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철저히 공개해야 한다. 투표용지 인쇄 기준과 수요 예측 시스템, 비상 공급 체계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관리 부실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선거에서 가장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 투표용지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종이 몇 장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 신뢰가 부족해지고 있다는 경고다. 선관위가 이번에도 책임을 흐리거나 제도 보완만으로 넘어간다면 더 큰 불신을 부를 수밖에 없다. 국민은 완벽한 선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상식과 기본은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허철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3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허철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3일 경기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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