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중국 선전 본사에서 열린 화웨이 실적발표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실적 수치보다 눈에 띈 것은 매화였다. 행사장이 온통 매화를 테마로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매화의 꽃말은 강인함과 고결함. “매화의 향기는 혹한에서 나온다(梅花香自苦寒來)"는 쉬즈쥔 화웨이 CEO의 말에선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를 이겨내겠다는 화웨이의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기자의 머릿속에는 “과연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를 뚫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3년이 흐른 지금, 그 의문은 차츰 가라앉는 듯하다. 얼마 전 화웨이가 공개한 이른바 '타오(韜)의 법칙'은 마치 혹한을 견뎌내고 피어난 매화 한 송이 같았다. 미국의 제재로 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접근이 막힌 상황에서도 칩 성능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공정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트랜지스터를 더 작게 만들어 성능을 높이는 '무어의 법칙'에서 벗어나 칩 내부 회로와 데이터 전송 구조 전체를 최적화해 신호 전달 시간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 게 핵심이다. '타오'는 전기 신호 전달 시간을 의미하는 물리학 용어인 '타우(τ)'라는 시간 상수에서 따왔다. '타오의 법칙'은 화웨이 반도체 팹리스(설계) 부문인 하이실리콘 허팅보 사장의 작품이다. 화웨이 내부에서는 그의 성을 따서 '허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허팅보 사장은 미국의 제재로 좌절이 밀려올 때마다 ‘두장옌’을 떠올렸다고 한다. 두장옌은 2300여 년 전 건설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의 고대 수리관개 시설이다. 강을 틀어막는 대신 물줄기를 바꿔 홍수 범람을 막아내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돼 오늘날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허 사장은 “전기도, 뉴턴의 법칙도, 기계 장비도 없던 열악한 환경에서도 두장옌을 완성했는데 오늘날 화웨이 엔지니어가 해법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에 맞서 반도체 공정 설계와 패키징, 시스템 아키텍처와 소프트웨어 최적화 등으로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강을 막을 수 없다면 물길을 바꾸겠다는 ‘두장옌의 지혜’였다.
이런 해법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화웨이는 지난해에만 1923억 위안(약 42조원)을 R&D에 투자했다. 지난 10년간 누적 투자액은 1조3800억 위안을 넘어선다. 미국의 제재가 가장 거셌던 시기에도 기술 투자를 줄이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화웨이 특유의 위기의식도 자리하고 있다. 2001년 초, 창업자 런정페이는 사내 매체에 '화웨이의 겨울'이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 당시 화웨이는 중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 기업으로 급성장하던 때였지만 그는 "지금은 봄이지만 겨울이 머지않았다"고 경고했다. 가장 잘나갈 때 위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2019년부터 이어진 미국의 전방위 제재도 그렇게 버텨낼 수 있었다. 오늘날 중국 기업인들 사이에서 '화웨이의 겨울'이 필독문으로 읽히는 이유다.
최근 AI 열풍 속 한국 반도체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사이클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오늘의 호황이 내일의 호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또 다른 겨울은 찾아올 것이다. 그때 우리도 매화처럼 버틸 수 있을까. 두장옌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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