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스테이블코인 이야기 | 진리·정의·자유] 한국형 원화 스테이블코인 가능할까

  • 이종섭 교수의 K콘텐츠 융합론과 한국형 디지털 금융의 미래

21세기 세계 경제는 지금 두 개의 화폐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금리와 환율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블록체인 위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디지털 통화 패권 전쟁이다. 과거 석유를 가진 나라가 세계 질서를 움직였다면, 이제는 디지털 결제망과 스테이블코인을 장악한 국가가 미래 금융질서를 주도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금융학회의 정책심포지엄은 바로 이러한 시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토큰증권(STO)과 스테이블코인의 확산과 금융경제의 변화’를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은 단순한 가상자산 토론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금융이 앞으로 생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국가 전략 회의에 가까웠다.
하나금융그룹이 1조원 규모의 두나무 지분을 전격 인수하며 가상자산 사업 확장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사진연바뉴스
하나금융그룹이 1조원 규모의 두나무 지분을 전격 인수하며 가상자산 사업 확장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사진=연바뉴스]


특히 이종섭 교수의 발언은 의미심장했다. 그는 “스테이블코인 도입 여부를 논의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단언했다. 세계는 이미 움직이고 있으며, 늦게 움직이는 국가는 질서를 따라가는 소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현재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약 3,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규모만 보면 아직 세계 외환시장이나 미국 국채시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성장 속도는 전통 금융 시스템을 압도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액수가 아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국제 송금, 온라인 결제, 디지털 자산 거래의 핵심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이를 단순한 민간 산업으로 보지 않는다. 미국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신(新) 브레턴우즈 체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과거 석유 결제를 달러로 묶어 페트로달러 시대를 열었다면, 이제는 블록체인 위의 디지털 달러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미국 국채의 토큰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미국 국채가 블록체인 위에서 실시간으로 거래되고, 세계 투자자들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미국 자산에 접근하게 되면 디지털 금융시장에서도 달러 중심 구조는 더욱 강화된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코인이 아니라 미국 금융 패권의 새로운 기술적 외피인 셈이다.


문제는 한국 같은 비기축통화국이다. 전 세계 디지털 결제가 달러 스테이블코인 중심으로 재편될 경우 원화의 국제적 영향력은 더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기업과 소비자들이 글로벌 디지털 시장에서 활동할수록 오히려 달러 생태계에 종속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종섭 교수는 한국형 모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핵심 논리는 단순하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은행 예금토큰을 신뢰 기반으로 삼고, 민간이 다양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서비스를 개발하도록 하는 ‘확장형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모델이 의미 있는 이유는 한국 금융시장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처럼 달러 패권국도 아니고, 중국처럼 강력한 자본 통제 체제를 가진 국가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와 모바일 결제 문화, 그리고 강력한 콘텐츠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결국 한국의 승부처는 ‘기축통화’가 아니라 ‘디지털 생태계’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K콘텐츠의 의미가 등장한다. BTS와 K팝, 웹툰과 게임, 드라마와 온라인 팬덤은 이미 국경을 넘어 하나의 글로벌 소비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젊은 세대는 한국 콘텐츠를 소비하며 한국 문화와 연결되고 있다. 만약 이 소비 흐름이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망과 연결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글로벌 팬덤이 음원 구매, 공연 티켓, 웹툰 결제, 게임 아이템 거래를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이용하게 된다면, 단순한 콘텐츠 수출을 넘어 디지털 금융 생태계 자체가 확장된다. 이는 장기적으로 원화 수요를 늘리고, 원화 기반 예금 및 국채 담보 수요를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 자본시장에도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기본적으로 담보자산을 필요로 한다. 안정성을 유지하려면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금과 국채, 우량 단기채권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한 가상자산 산업 육성을 넘어 한국 금융시장 전체의 유동성과 깊이를 키우는 효과로 연결될 수 있다. 나아가 국채 시장의 국제화와 토큰증권(STO) 시장 활성화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번 글로벌금융학회 정책심포지엄은 단순한 학술행사가 아니라 한국 금융정책 방향의 전환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금융당국은 가상자산을 투기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스테이블코인을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 싱가포르, 홍콩, UAE 등 주요 금융 허브 국가들은 규제와 육성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디지털 자산을 막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다.


미국의 경우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디지털 달러 패권을 강화하려 하고 있으며, 유럽은 유로 기반 디지털 결제 생태계를 구축하려 한다. 싱가포르는 글로벌 디지털 자산 허브 전략을 추진 중이고, 홍콩 역시 중국 본토와 연결되는 디지털 금융 관문 역할을 노리고 있다.


한국이 뒤처질 경우 단순히 블록체인 산업 경쟁력을 잃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래 글로벌 결제망과 자본 흐름에서 주변부 국가로 밀려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포럼의 가장 큰 의미는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질서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암호화폐가 아니라 국제 금융, 지급결제, 국채시장, 디지털 무역, 플랫폼 경제와 연결된 거대한 구조 변화의 일부가 됐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법정화폐 담보형이다. 미국 달러나 국채, 예금 등을 담보로 발행하는 방식이다. 가장 안정성이 높아 현재 시장의 주류를 차지한다.

둘째는 암호자산 담보형이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가상자산을 담보로 삼는다. 탈중앙화 장점은 있지만 가격 변동성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셋째는 알고리즘형이다. 알고리즘으로 공급량을 조절해 가치를 유지하려는 구조다. 그러나 과거 대규모 붕괴 사례가 발생하면서 신뢰 문제가 커졌다.

넷째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연계형이다. 중앙은행의 신뢰를 기반으로 민간 결제 시스템과 연결하는 방식이다.


세계 주요국은 대부분 첫 번째와 네 번째 모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민간 스테이블코인과 국채시장을 결합시키고 있고,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중심으로 국가 통제형 모델을 구축 중이다.


한국이 벤치마킹해야 할 핵심은 기술보다 ‘생태계 전략’이다. 한국은 미국처럼 달러 패권이 없고 중국처
럼 강력한 국가 통제력도 부족하다. 대신 콘텐츠와 플랫폼 경쟁력이 있다.


따라서 한국은 금융·문화·플랫폼을 융합한 독자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단순히 코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K콘텐츠 소비와 디지털 결제를 연결하고, 이를 토큰증권과 자본시장 혁신으로 이어가야 한다.


한국형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는 결국 K콘텐츠와 플랫폼 경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 콘텐츠 영향력을 갖고 있다. K팝과 드라마, 웹툰과 게임은 이미 글로벌 디지털 소비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시스템이 결합될 경우, 한국은 단순한 콘텐츠 수출국을 넘어 디지털 문화·금융 플랫폼 국가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위해 정책당국의 역할도 중요하다.


첫째, 명확한 규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불확실성이 가장 큰 리스크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기준과 담보 규정, 소비자 보호 체계를 조속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은행과 핀테크 기업, 콘텐츠 플랫폼 간 협력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금융과 문화 산업이 따로 움직여서는 시너지가 나오기 어렵다.

셋째, 토큰증권(STO) 시장과 연계한 자본시장 혁신이 필요하다. 국채와 회사채, 콘텐츠 IP까지 토큰화가 가능해질 경우 한국 자본시장의 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넷째, 국제 협력 전략도 중요하다.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망을 확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가상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디지털 문명 질서 속에서 어떤 나라가 플랫폼을 장악할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K콘텐츠와 디지털 금융을 연결하는 새로운 실험이 성공한다면, 원화는 더 이상 작은 비기축통화가 아니라 아시아 디지털 경제의 중요한 연결 통화로 진화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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