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생산적 금융, 구호 아닌 실행으로 증명해야"

중동 정세 불안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지고 기업들의 자금조달 부담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자본규제 완화를 통해 약 100조원의 추가 자금 공급 여력을 확보하겠다고 밝힌 것은 필요한 대응이다. 금융 불안이 실물경제 위축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면 시장을 안정시키고 자금 흐름을 붙들어 두는 조처가 먼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방안이 단순한 유동성 공급에 머물지 않고 전략산업, 수출, 에너지 전환 같은 분야로 자금을 돌리겠다고 밝힌 점은 방향만 놓고 보면 타당하다. 지금처럼 대외 충격이 잦고 산업 재편이 빨라지는 시기에는 금융이 부동산 담보대출이나 안전한 여신에만 머물러서는 경제의 활로를 만들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대책이 얼마나 실제로 작동하느냐다. 그동안에도 생산적 금융 확대, 혁신기업 지원, 미래 산업 투자 같은 구호는 숱하게 나왔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는 자금이 꼭 필요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신산업 기업들이 돈줄이 막혔다고 호소하는 일이 반복됐다. 은행은 담보와 보증이 충분한 대출에 몰렸고, 금융회사는 위험을 이유로 새로운 투자에 소극적이었다. 말은 생산적 금융이었지만 현실의 돈은 늘 안전한 곳으로 흘렀다. 이번 대책이 과거와 다른 결과를 내려면 공급 규모를 부풀리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자금이 어디로 가는지부터 끝까지 따져 물어야 한다.
 
정부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금융권의 보수성을 탓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험을 함께 떠안을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손실 부담은 민간이 지고 정책 성과만 요구하는 구조에서는 어느 금융회사도 모험자본 공급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 정책금융기관의 보증과 출연, 이차보전, 공동대출 같은 수단을 더 촘촘히 엮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금융회사들도 중소기업과 혁신기업 대출을 늘릴 유인을 갖게 된다. 동시에 자금 지원의 성과를 공급 총액이 아니라 실제 집행 규모, 업종별 배분, 금리 부담 완화, 고용과 투자 효과 같은 지표로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보여주기식 실적 경쟁을 막고 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또 하나 놓쳐선 안 될 대목은 속도와 책임이다. 위기 국면에서는 늦게 도착한 지원이 사실상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정부는 금융권의 자율적 협조를 기대하는 데 머물지 말고 자금 집행이 막히는 지점을 상시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이 현장에서 겪는 애로를 신속히 반영해 기준을 보완하고, 금융회사들이 지원 실적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의 공공성도 확보된다.
 
자본 규제 완화의 부작용을 살피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시중 유동성이 생산과 투자로 향하지 않고 다시 자산시장으로 몰리면 정책은 엉뚱한 곳에서 거품만 키울 수 있다. 감독 완화와 건전성 관리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 결국 이번 조치의 의미는 숫자 자체보다 자금이 절실한 곳에 제때 닿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가 이번 조치를 경기 방어용 숫자로만 소비한다면 결국 금융권의 관성만 확인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위험 분담과 성과 점검, 현장 대응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위기 대응을 넘어 산업 전환의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관건은 말이 아니라 집행의 의지와 능력이다. 시장은 발표보다 실행을 보고 움직인다는 평범한 사실을 정부는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 명심하라. 그것이 신뢰다. 그것이 힘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이억원 금융위원장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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