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의미의 은행은 중세 유럽 상업도시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탈리아 상업도시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에서 활동하던 환전상이 그 출발점이다.
이들은 시장 한쪽 나무 벤치(banco)에서 여러 지역 화폐를 교환해줬는데 여기서 은행(bank)이라는 단어가 유래됐다. 이후 상인들이 금과 은을 맡기기 시작하면서 단순 환전 기능을 넘어 예치·보관 기능이 추가됐다.
시간이 지나며 은행의 역할이 확대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업 거래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기능에 가까웠다. 장거리 무역 시 현금을 들고 다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은행에서 어음과 신용장을 발행했다. 지역마다 달랐던 현금 단위와 금·은 순도를 보증하고 동일 기준으로 환전해 주기도 했다.
현재와 같지는 않지만 대출 기능을 일부 담당하기도 했다. 도시국가나 왕실에 전쟁과 건설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는 식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은행이 교황청 재정을 관리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당시 은행의 핵심 역할은 돈을 빌려주는 것 이전에 자금 흐름을 연결하고 이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기능으로 작동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생산적 금융'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은행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자산 규모와 수익성 측면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견조한 구조를 갖췄다. 고금리 상황과 가계대출 관리가 맞물리며 예대금리차가 확대됐고, 순이자마진 역시 역사적 평균 대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전과는 달라진 은행의 기능이다. 현재 자금 흐름을 보면 은행 대출은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낮은 주택담보대출과 우량 기업 대출에 집중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반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 대한 자금 공급은 경기 변동에 따라 위축되는 모습이 반복된다. 이는 금융이 경기 하강기에 위험을 완충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금 공급을 축소해 실물경제의 변동성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한국 경제는 저성장·고령화·산업 구조 전환이라는 복합 과제 한가운데에 있다. 이때 금융이 단순히 위험을 회피하는 방어적 역할에 그칠 것인지, 미래 산업과 지역경제로 자금이 흐르도록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인지에 따라 경제의 성장 경로를 좌우하게 된다.
당장 필요한 것은 은행 수익을 문제 삼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금융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작업이다. 은행의 이익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것보다 이익이 생산과 투자로 이어지는 경로를 강화하는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자금이 생산과 투자로 연결될 수 있는 순환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혁신기업·중소기업에 대한 위험공유형 대출, 지역 기반의 금융 확대 등은 금융이 다시 실물경제의 성장 기반으로 기능하기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다. 기술력과 사업성을 반영한 평가 체계 고도화, 민간 금융과 정책금융이 공동으로 위험을 분담하는 구조 정착 노력도 있어야 한다. 아울러 지역과 산업별로 자금이 순환하는 금융 생태계를 구축해야 자금이 수도권·부동산에 편중되는 구조를 완화할 수 있다.
중세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보여줬듯이 은행은 부를 저장하는 금고가 아니라 경제의 혈류를 만드는 기관이었다. 금융이 다시 흐름을 회복할 때 한국 경제의 성장 역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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