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형 인공지능(AI) 기본법이 시행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 법률의 발효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인공지능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어떤 문명적 질서 속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대한 첫 제도적 선언이다. 기술의 속도가 인간의 제도와 윤리를 앞질러 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이번 법 시행은 분명 시대적 요청의 산물이다.
AI는 이미 산업과 일상, 행정과 의료, 금융과 교육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효율과 편의, 생산성과 예측 가능성을 앞세워 사회를 재편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윤리, 권리 보호의 장치는 뒤처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AI 기본법은 기술을 방임의 대상이 아니라 규율과 책임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평가받아 마땅하다.
특히 국민의 권익 보호라는 측면에서 이 법의 의의는 작지 않다. 고위험 AI에 대한 관리 의무, 차별 방지 원칙, 설명 요구권을 제도화함으로써 AI로 인한 오판과 권리 침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시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을 열었다. 기술 발전 과정에서 가장 먼저 소외되기 쉬운 노년층과 장애인, 디지털 취약계층에게 이는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존엄을 잠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제도적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 법은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사설의 역할은 평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문제는 규제의 방향과 강도, 그리고 그 설계 방식이다. 한국 AI 기본법은 여러 조항에서 과도한 규제의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위험 AI’ 개념의 지나친 포괄성이다. 행정, 의료, 법률, 금융, 교육 등 거의 모든 전문 영역이 일괄적으로 고위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구조는 실제 위험도에 비례한 정교한 규율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규제가 필요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채, 기술 활용 전반에 위축 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설명 가능성과 투명성 의무 역시 원칙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대규모 언어모델과 딥러닝 구조가 가진 기술적 특성과 한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법적 의무로 고정될 경우, 이는 실질적 책임 강화가 아니라 형식적 보고서와 문서의 양산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법은 기술의 현실 위에 서야 한다. 불가능하거나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는 규범은 결국 신뢰를 잃는다.
사전 등록과 사전 점검 중심의 규제 설계 또한 재고할 지점이다. AI 산업은 실험과 실패, 반복을 통해 발전한다. 속도가 생명인 이 영역에서 과도한 사전 규제는 특히 스타트업과 중소 개발사에게 치명적인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다. 이미 개인정보보호법, 의료법, 금융 관련 법령 등 개별 규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중복 규제는 법적 불확실성만 키울 뿐이다.
글로벌 시각에서의 우려는 더욱 크다. 유럽연합은 규제를 통해 미국 빅테크에 대응할 수 있는 시장 규모와 정치적 결속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기초 모델과 플랫폼 영역에서 여전히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취약한 위치에 있다. 이 상황에서 강한 규제를 선제적으로 도입하면 국내 기업은 규제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는 반면, 글로벌 기업은 이를 흡수하거나 우회할 여력이 있다. 규제가 산업 보호가 아니라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다.
기본과 원칙, 상식의 관점에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다. 규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은 국민의 안전과 권리 보호, 그리고 지속 가능한 혁신이다. 진리와 정의, 자유라는 민주 사회의 기본 가치는 기술 앞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도전과 창의적 실험 역시 제도에 의해 질식되어서는 안 된다.
AI 기본법의 방향성은 옳다. 그러나 획일적 사전 규제보다는 사후 책임 강화, 분야별 차등 규율, 규제 샌드박스 확대라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법은 완성형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제도여야 한다. 시행 이후 산업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고,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조항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고쳐 나가는 용기와 지혜가 요구된다.
오늘의 법 시행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기술의 속도 앞에서 제도가 겸손해질 때, 규제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공의 신뢰를 지키는 장치가 될 때, 한국의 AI 거버넌스는 비로소 세계적 기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본과 원칙, 상식을 지켜온 사회가 기술 시대에 선택해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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