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의 경제가 답이다] K자형 양극화 성장의 한계 극복하기

··박원재 논설고문
[박원재 논설고문]


2026년 벽두에 들려오는 경제 뉴스에 희망이 넘친다. 주요 경제지표의 실적과 전망치가 하락 대신 상승, 감소 대신 증가, 축소 대신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 역대 최고치 또는 최대치 기록도 거뜬히 갈아치우고 있다.

작년 수출은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약 1013조원)를 넘었다.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이룬 대기록이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수출로 먹고사는 개방형 경제인 한국에서 수출 증가는 얘기만 들어도 배가 부른 느낌을 주는 든든한 소식이다.

지난해 1년 동안 75.6% 올라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던 코스피는 새해 개장 후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 증시의 추가 상승여력을 반신반의하던 국내외 증권사들은 올해 코스피 전망의 최상단을 5200까지 높여 잡았다. ‘꿈의 코스피 5000’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경이로운 수출 실적과 코스피의 질주는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이어진 정치 사회적 혼란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 글로벌 공급망 급변 등 대내외 악재 속에서 이룬 것이어서 더욱 값지고 의미가 깊다.

이제 한국 경제는 10년 넘게 발목을 잡고 있는 저성장과 경기침체에서 탈출해 성장과 도약의 선순환 궤도에 다시 진입할 수 있을까.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양극화 양상의 회복을 뜻하는 K자형 성장(역성장 포함)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답해야 한다.

일반적인 경기 사이클은 급락 후 바닥을 짧게 찍고 빠르게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V자형이나 하락 후 저점 구간이 꽤 길게 이어졌다가 서서히 회복하는 U자형이 대표적이다. K자형 성장에선 위쪽 집단은 빠르게 개선되는 반면 아래쪽 집단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악화되면서 성과와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벌어진다.

K자형 양극화 성장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지만 한국은 K의 기울기가 유독 가파르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첨단 산업과 전통 제조업의 격차가 심한 상태에서 디지털 전환 가속화, 인공지능(AI) 열풍, 수출 편중 회복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가 1.8% 성장해 잠재성장률에 근접하지만 정보기술(IT) 부문을 제외한 성장률은 1.4%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1% 턱걸이 성장에 그친 한국 경제가 반도체 슈퍼 사이클(초호황기)에 힘입어 수치상으로는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겠지만 그 성과가 반도체 등 잘나가는 일부 수출 기업에 쏠리는 K자형 양극화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부문간 회복 격차가 커 체감경기와는 괴리가 클 것”이라며 “K자형 회복은 결코 지속 가능하고 완전한 회복으로 보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K자형 양극화는 반도체 호황과 맞물려 최근 들어 부각됐지만 한국의 산업 전반에 이미 깊숙이 퍼져 있는 현상이다. 반도체 자동차 등 일부 업종의 약진과 선방에도 불구하고 석유화학 철강 기계 등 한국 제조업을 수십년간 지탱해 온 업종들은 활로를 못 찾고 있다. 수출 기업이 승승장구하는 뒤쪽에서 내수는 위축돼 있고, 상당수 중소기업들이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체 수출 중 반도체와 자동차 합산 비중이 분기 기준 30%를 넘기는 등 수출 상위 2개 품목의 집중도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특히 22% 증가한 반도체는 전체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수출 증가분을 홀로 책임지다시피했다. 상위 10대 기업의 수출 비중이 40%대까지 높아지고, 반도체 및 자동차 관련 업종과 다른 제조업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코스피의 반도체 편중 현상은 더 극적이다. 시가총액 중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 1을 웃돌면서 두 종목의 주가 급등이 지수를 끌어올려도 다수 종목은 박스권에 머물거나 약세를 반복하는 형태가 굳어지고 있다. 처음으로 장중 4500선을 찍은 5일 코스피 전체 상승분(147.89포인트) 중 삼성전자 한 종목이 끌어올린 기여분은 60포인트가 넘었다.

지수가 상승세로 마감해도 오른 종목보다 내린 종목이 많은 건 코스피의 ‘뉴노멀’이 되고 있다. 8일 종가 기준으로 주가가 오른 종목은 178개에 그쳤지만 떨어진 종목은 730개나 된다. 반도체 착시는 상당수 개인투자자들이 주가 상승을 체감하지 못하고, 코스피 상승이 자산 효과를 통한 소비 증가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되고 있다.

석유화학 철강 기계 등 중후장대형 제조업과 고용 창출력이 큰 건설업, 서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내수 업종의 침체는 좀처럼 반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석유화학은 세계적인 공급과잉에 따른 적자 누적으로 가동률이 떨어진 가운데 통폐합을 통한 설비 축소 압박에 몰려있다. 철강 정유 등 소재 산업은 중국산 저가 공세에 범용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져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고 있다. 수출 증가가 고용과 소비 확대로 이어지는 낙수효과가 과거와 달리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제조업 취업자 감소 폭이 커지고 내수 부진이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 등 특정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산업 구조는 글로벌 경기변동과 외부 변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AI 열풍에 힘입어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지만 반도체 호황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건 여러 차례 경험한 사실이다. 주력 산업의 기반이 얇고 좁으면 위기가 닥쳤을 때 경제 전체에 가해지는 충격이 커지고 기력을 되찾는 과정도 고통스럽고 험난하다.

K자형 양극화 성장의 또 다른 문제는 증시의 반도체 착시처럼 ‘성장 착시’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수출이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워도 달러 공급 부족으로 환율이 치솟은 것처럼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고용 없는 회복’이라는 허탈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K자형 양극화는 산업 불균형에 그치지 않고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불평등 형태로 사회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산을 소유한 계층은 부동산과 주식가격 상승으로 자산과 자본소득이 크게 늘었지만 무주택 저자산 계층은 실질소득 정체 속에 자산 형성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정규직 근로자와 중소기업·비정규직·플랫폼·저숙련 근로자, 수도권과 지방, 취업 기성 세대와 미취업 청년 세대 등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강화되는 현상도 K자형 양극화의 범주에 속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9일 경제성장전략 국민보고회에서 “지금은 과거와 다른 소위 K자형 성장이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라며 성장의 혜택이 국민 모두에게 고르게 귀속되지 않는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정 분야에 치우친 성장이 고착되지 않게 산업 구조를 선진화하고, 계층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개혁하며, 성장의 온기가 미치지 못하는 윗목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이야말로 정부가 역량을 집중해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최우선 국정과제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포용성장과 균형성장은 K자의 기울기를 완만하게 하고 부작용을 줄이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성장의 과실과 기회가 다양한 계층과 지역에 고르게 돌아가는 포용성장은 공동체의 안정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어렵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방향이다. 하지만 경제논리를 무시하고 단기간에 무리한 교정을 시도하면 과거 소득주도 성장 때처럼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시장 왜곡의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K자형 성장이 양극화 형태의 불완전한 성장일지언정 저성장 고착화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든 것은 기업들이 일궈낸 소중한 성과다. 세계 선두를 다투는 업종은 혁신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뒤처진 업종은 강점 분야 발굴과 육성을 통해 생존력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투트랙 맞춤형 정책으로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여당 일각에서 이미 착공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지방으로 이전하자는 선거용 선심성 발언이 나오는 것은 모처럼 생기기 시작한 투자 의욕에 찬물을 끼얹고 ‘글로벌 수출 5강’의 기회를 걷어차는 경제 자해 행위에 가깝다.

K-팝 K-푸드 K-콘텐츠 K-컬처 K-게임 등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자부심으로 쓰인 K가 우울한 경제 자화상을 상징하는 단어의 앞자리에 놓이게 된 건 씁쓸한 아이러니다.

한국 산업은 이미 반도체 조선 바이오 방산 등에서 한국을 상징하는 K를 보유하고 있다. K-산업이 K-반도체 K-조선 K-바이오 K-방산을 아우르는 대표 용어가 되고, K자형 성장은 모범적인 경제 모델을 뜻하는 ‘K-성장(한국형 성장)’으로 진화해야 한다.

K자형 양극화 성장의 부작용을 줄이는 작업은 산업 구조의 선진화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최대 숙제인 양극화 해소를 향한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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