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치가 속절없이 추락하면서 해외로 공부하러 떠났던 유학생들이 돌아오고 해외여행은 엄두를 내기 힘들어졌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면서 돈이 돈값을 하지 못하는 초유의 상황을 경험했다. 요즘처럼 환율이 달러당 1470원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 달러 사재기 욕구가 없다가도 생겨나고, 막연하게나마 경제위기의 망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늘어난다.
최근의 환율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외환위기 때의 75% 수준이지만 ‘위기’가 아닌 ‘평시’의 환율치고는 비정상에 가깝게 높은 게 사실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올해 초 분석한 한국의 균형환율(경제상황을 감안한 적절한 통화가치)은 2002년 말 1179원에서 2024년 말 1351원으로 상승했는데 실제 환율은 지속적으로 이보다 높은 선에서 형성됐다. 원화가 적정 가치보다 더 싸게 거래되고 있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 원화 디스카운트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환율 상승 속도가 빠르다고 이를 위기와 연결 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997년 외환위기는 단기상환 외채의 급격한 증가가 원인이지만 현재 한국은 대외자산 순채권국이다. 각종 연기금과 기업, 개인이 해외에 직간접으로 투자한 자산이 크게 늘어난 상태여서 예전처럼 단기외채 상환불능형 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은 없다. 최근의 환율 상승은 국내 투자주체들이 외채를 짊어져서가 아니라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달러 자산을 사들이면서 가속화된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수출과 수입 의존도가 높은 개방형 경제구조에서 환율의 급상승, 원화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경제에 주름살을 키운다. 수입물가 상승과 기업 원가부담 증가, 인플레이션과 구매력 저하, 실질소득 감소, 소비 위축을 초래해 가까스로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내수경기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고환율의 영향으로 1년 전보다 2.4% 오르며 두달 연속 올 들어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요즘 해외여행 중 현지의 사설 환전소를 이용하면 원화는 공식 환율에서 10% 정도 더 깎이는 걸 감수해야 한다.
통상 환율이 상승하면 물가가 오르는 대신 무역수지가 개선되는 효과가 있지만 현재 한국 수출은 반도체와 중간재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에 묶여 있어 ‘원화 약세, 수출 증가’ 공식이 작동할 여지가 줄었다.
국민연금을 상대로 한국은행과의 외환스와프 연장과 전략적 환헤지 확대, 해외투자 비중 조정 등을 주문했다. ‘서학개미’(해외주식 개인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투자를 겨냥해 증권사들의 해외주식 판매 실태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기업들이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풀지 않는 바람에 달러 공급이 줄어 환율이 올랐다며 원화 환전을 독려하고 있다.
환율 관리에 동원된 부처 및 기관은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를 비롯해 한국은행 국민연금공단 보건복지부 산업통상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6곳에 이른다.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범정부 차원의 총력전이다.
환율이 출렁일 때 당국의 대응은 구두개입을 통해 변동 폭을 줄이고, 필요할 경우 보유 외환을 풀거나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이번 환율 상승 국면에서 나타난 정부의 행보는 정당한 개입과 부당한 간섭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
수익성을 좇는 자금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려는 시도여서 의도한 효과를 거둘지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환율 변동을 제어할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다는 점을 자인한 것으로 해석돼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에 ‘환율 소방수’ 역할을 떠맡기는 것은 전례 없는 조치일 뿐 아니라 수익성과 안정성이라는 국민연금의 기본 원칙을 훼손할 위험이 크다. 국민연금이 환율 방어라는 단기 거시정책 목표 달성에 동원되는 것은 가입자인 국민들의 보편적 상식에 맞지 않고, 이 과정에서 직간접 손실이 생기기라도 하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올해 1∼11월 서학개미들의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305억8941만 달러(약 45조원)로 지난해 전체 순매수(105억4500만달러)의 3배에 이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개인들의 해외투자가 유행처럼 커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는 환율 상승의 본류와 지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거나 뒤바꿔서 나온 잘못된 진단이다. 달러가 빠져나가는 핵심 요인을 제껴둔 채 만만한 희생양 찾기로 환율 관리 실패의 책임을 피하려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기업들의 달러 보유가 늘어난 것은 환차익 극대화, 해외투자 대비, 결제대금 확보를 염두에 둔 합리적 경영 판단에 따른 결과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협상으로 떠안게 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부담은 당장 달러를 팔면 생기는 단기 차익에도 꿈쩍하지 않고 달러를 계속 쌓아두게 하는 유인이 된다. 정부가 제시하는 정책금융 금리 인하 같은 인센티브 정도로 기업의 달러 선호 심리를 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환율 상승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단기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이 맞물려 생겨난 현상이다. 40개월째 이어진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역전, 국내 증시에서 이익을 낸 외국인 투자자들의 차익실현용 주식 매도, 국내 투자주체들의 해외 주식 투자 증가,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 확대 등이 달러화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한국 경제의 성장세 둔화와 제조업 부진, 초저출산과 고령화 같은 인구구조 변화는 한국 원화에 대한 선호도를 떨어뜨렸다.
당국의 정책은 외환시장에서 달러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통해 환율을 안정시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원화가치 하락은 환율 상승의 다른 이름이지만 원화가치의 적정성 유지라는 측면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환율은 단기적으로는 금리와 달러 수급, 투자심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길게 보면 성장률, 생산성, 경상수지, 재정 건전성, 민간부채 같은 펀더멘털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경직적인 임금 및 고용 관행,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막는 규제는 잠재성장률을 떨어뜨리고 통화 약세 요인으로 작용한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원화는 장기적 약세 통화 후보로 분류돼 추가적인 디스카운트가 붙고 적정 가치보다 더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원화가 균형환율보다 싸게 거래되고 제값을 받지 못하는 건 한국 경제의 체질이 약해지고 매력이 떨어졌다는 증거이자 자본유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신호다.
환율은 미국의 금리 인하와 함께 한국의 수출 호조, 코스피 회복이 본격화하면 변동 폭을 줄이고 당분간 하향 안정세를 되찾을 가능성이 크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단기적으로 외환 수급을 맞춰 시장이 안정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장기적으로 국가경쟁력을 높여 외환이 철철 넘치는 경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번 고비를 넘겨도 국가경쟁력을 높이지 못하고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을 치유하지 못하면 달러 유출은 심해지고 환율은 다시 치솟을 것이다.
환율 논란은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수출이 늘고 있지만 반도체 자동차 등 소수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시장은 미국과 중국에 편중된 한계를 안고 있다.
올 1∼11월 누적 수출액은 6402억 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9% 증가해 11월 누적 기준 사상 최대를 기록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액은 작년보다 1.5% 감소했다. 장기간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내수 기반은 붕괴 직전이고, 석유화학 철강 등 한국 제조업을 대표한 전통 산업은 중국산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한·미 관세협상에 따라 한국의 산업기반이 서서히 미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관측도 한국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경제 성장 둔화가 원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라고 말했다.
고환율이 경제 운용의 상수(常數)가 된 만큼 정부의 통화 재정 정책은 확장재정에서 벗어나 물가 관리에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 물가를 자극하는 소비쿠폰 배포 등 선심성 돈 풀기는 최대한 자제하고 재정의 역할을 경제의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게 안정된 환율, 제값 받는 원화를 만드는 출발점이다. 달러가 귀했던 시절엔 ‘달러를 버는 게 애국’이었다. 그런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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