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의 경제가 답이다] 비 올 때 금고만 지키는 은행

  • 한국 경제 체질 강화는 은행을 은행 답게 만드는 데서 시작

··박원재 논설고문
[박원재 논설고문]

금융그룹 회장을 선임할 때 이사회 멤버 위주로 구성된 회장추천위원회(회추위)가 추천 근거로 삼는 논지는 대동소이하다. 경제여건이 어렵고 경쟁이 치열한 중에도 재임 중 수익 기반을 확충하고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 또는 높은 이익증가율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최고경영자(CEO)의 성과는 수치가 증명한다는 명제를 적용하면 좋은 실적은 은행장이 회장으로 추대되거나 회장이 연임을 달성하는 데 최고의 무기이자 명분이 된다.

올해 초 주요 금융그룹 회장의 선임 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펼쳐졌다. 정부가 현직 회장과 회장이 영입한 사외이사의 결탁 소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상기류가 생기는 듯했지만 사상 최대 실적을 내세운 회장들은 무사히 연임에 성공했다.

정부로서도 민간 기업인 금융회사의 경영진 인사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경영 자율성 침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금융당국이 은행의 건전성 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주문하는 관행이 정당한 행정지도인지, 금융회사를 옥죄는 관치금융인지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돼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숨 돌린 금융그룹과 은행들은 생산적 금융 확대라는 정부 기조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미래 산업과, 기술력이 있지만 담보가 부족한 혁신 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5대 금융그룹(KB 신한 하나 우리 농협)은 향후 5년간 500조원 이상을 생산적 금융에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1분기에 집행된 자금이 36조원에 이른다는 집계도 나왔다. 생산적 금융이 금융권의 화두가 됐지만 기준이 모호한 탓에 은행의 기업대출 총량 중 실제로 생산적 금융의 취지에 맞게 공급된 자금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생산적 금융과 관련된 이벤트가 부쩍 늘었지만 은행이 주력하는 분야는 여전히 주택을 담보로 한 가계대출과 안정된 수입이 있는 직장인 대상의 신용대출이다. 가계대출 연체율이 계속 올라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되고 있고, 마이너스 대출은 주식 투자 열풍과 맞물려 신용 불량자를 양산할 위험을 키우고 있다.

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고 부실 위험이 낮은 대기업 대출에 집중하면서 기업 대출의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20개 국내 은행(시중·지방·인터넷전문·특수은행)의 3월말 대출잔액 중 대기업 비중은 10년 만에 가장 높았고 중소기업 비중은 3년 연속 줄었다.

내수 침체로 자영업자 폐업이 늘고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심각하지만 은행의 실적은 더 좋아지고 있다. KB 신한 하나 우리 등 4대 금융지주의 상반기 순이익은 11조원이 넘어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할 것이 확실시된다. 장기간의 내수 불황에도 대표적 내수 업종인 은행은 ‘나홀로 호황’을 구가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대목에서 한국의 은행에 대해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은행은 경영의 자율성이 100% 존중되는 민간 사(私)기업인가, 아닌가. 은행은 무슨 자격으로, 누구에게서, 어떤 방식으로 막대한 돈을 버는가. 은행의 사상 최대 이익은 건강한 것인가.
은행은 민간 주주들로 구성된 주식회사이지만 일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과 달리 단순한 사기업이 아니다. 국가가 발급한 은행업 라이선스 덕택에 과점 시장에서 제한된 수의 플레이어끼리 기본 이윤을 사실상 보장받으며 영업하는 준(準)공공적 성격의 인허가 산업이다. 잠재적 경쟁자의 진입을 막는 면허 장벽의 울타리 안에서 정부의 예금보호와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 등 공적 혜택을 누린다는 점에서 특권 업종이기도 하다. 주주가 있는 주식회사인 만큼 이윤 추구는 당연하지만 일반 기업과 달리 사회적 책임과 공공의 가치에 충실해야 하는 덕목을 요구받는 이유다.

은행의 핵심 수익원은 낮은 금리로 예금을 받고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면서 생기는 예대마진(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이다. 연체율이 상승하면 은행이 쌓아야 하는 충당금도 늘지만 예대마진을 넉넉히 정해둔 덕에 이자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크고, 담보를 잡고 있기에 돈을 떼일 위험은 상대적으로 낮다. 차주가 고금리의 부담을 떠안고 예금자가 실질금리 하락을 감내하는 사이 은행의 이익과 성과급 재원은 안정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다.

엄밀히 따지면 ‘리스크를 감수한 대가’나 ‘경쟁을 통해 거둔 성과’가 아니라 과점 체제와 면허 특권의 우산 속에서 챙긴 초과이익에 가깝다. 예대마진을 늘리고 수수료 수입을 극대화하는 영업전략이 유효한 상황에서 실물 경제의 생산성과 혁신을 뒷받침하는 책무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예금 점유율은 70%가 넘어 국민 10명 중 7명이 5대 은행에 돈을 맡기고, 대출은 약 3분의 2를 담당한다.

가계부채 급증으로 금융당국이 이달 들어 대출 관리를 강화하자 은행들은 일제히 대출한도를 축소하고 있다. 자금 수요가 많다는 명분으로 담보 대출을 늘려 이자 수익을 충분히 확보한 뒤 당국의 조치에 따르는 방식으로 돈줄 조이기에 나선 것이다. 금융당국과 은행의 ‘대출 확대-축소 숨바꼭질’이 반복되면서 피해를 보는 것은 갑작스럽게 자금 조달이 막힌 실수요자들이다.

국내 은행들의 영업에서는 금융기법 혁신, 글로벌 경쟁력, 생산적 금융이라는 용어보다 예대마진, 담보 대출, 갖가지 명목의 수수료가 더 익숙하다. 디지털 전환과 핀테크 도입을 자랑하지만 디지털의 외양을 입혔을 뿐 소비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인터넷과 모바일로 간편하게 이자와 수수료를 내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은행의 탐욕을 비판하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국가가 부여한 은행업 라이선스가 건강한 금융 시스템의 구축에 기여하지 못하고 과점 은행의 특권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

은행의 공적 기능 부재는 대통령이 ‘땅짚고 헤엄치기식’ 이자 장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단계까지 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금융기관(은행)은 국가 면허와 예금자 보호라는 공적 안전망을 바탕으로 독점적 영업을 한다”며 “한국은행 자금을 지원받아 대출 이자 수익을 올리는 만큼 당연히 반 이상은 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쉬운 주택담보대출 같은 이자놀이, 이자 수익에 매달릴 게 아니라 투자 확대에도 신경을 써달라”며 예대마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행태를 경고하기도 했다.

은행들은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 부동산 가격 폭락 등으로 부실 위기에 빠질 때마다 공적 안전망의 보호를 받았다. 은행의 부실이 시스템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는 부실채권 처리와 공적자금 투입 등을 통해 은행을 지원했다. 지금 은행의 문제는 특권과 책임 사이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데 있다.

정부가 증시 활성화 정책으로 부동산에 쏠린 시중자금을 자본시장으로 유도하려 애쓰고 있지만 소수의 대기업 대출과 주택담보 가계대출에 편중된 은행의 자금 중개 메커니즘을 정상화하지 못하면 반쪽 성공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은행 창구에서 소외된 서민, 자영업자, 중소기업의 내상(內傷)이 깊어지고 경제의 재도약도 어려워진다.

은행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생산적 금융을 은행권의 뉴노멀로 정착시키려면 은행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라이선스의 규율 정립과 인센티브의 재설계가 해법이 될 수 있다.

고위 당국자의 엄포와 구호만 요란한 이벤트성 행사로 은행이 진정성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은행 경영의 자율성을 존중하되 혜택과 불이익의 조건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고쳐 은행이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예대마진과 이자 수익, 고객 집단별 금리 등을 실시간에 가깝게 공시하고 타 은행에 비해 과도한 수준일 경우 추가 충당금 적립, 특별 부담금 부과, 성과급 제한 같은 불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택담보대출의 위험 가중치를 높이는 대신 생산적 금융과 혁신 기업 대출엔 낮은 위험도를 부여해 자기자본비율 관리상 기업 대출을 늘리는 게 유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은행업 라이선스를 기능별로 세분화해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지역금융 등에 특화된 은행들이 기존 대형 은행과 공정하게 경쟁하는 길을 터주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은행이 예상대로 하반기에 기준금리를 올리면 돈을 빌린 기업과 가계의 이자 부담은 커지겠지만 은행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예대마진을 조정해 수익을 늘리는 기회로 삼으려 할 것이다. 대출금리는 민감하게, 예금금리는 둔감하게 올리는 관행을 이번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사상 최대 이익으로 금고를 두둑히 채우는 과점 은행들은 언제까지 ‘비올 때 우산 뺏는 은행’으로 남을 것인가. 한국 경제의 체질을 튼튼히 하는 작업은 은행을 은행답게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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