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지난 11월 롯데케미칼의 인도네시아 석유화학 단지 준공식이 열렸다. 총 39억 달러(약 5조6000억원)가 투입된 이 사업은 인도네시아 내수의 약 90%를 충당하고, 석유화학 제품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는 동남아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외국 기업의 기공식이나 준공식에 대통령의 참석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해당 사업에 관한 중앙정부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이번 준공식에 참석했다. 게다가 경제조정부 장관, 투자·전방산업부 장관, 에너지·광물자원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국무부 장관, 내각 총비서 등 주요 각료 6명을 대동함으로써 롯데 석유화학 사업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했다.
축사에서 프라보워는 한국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선진국으로 도약한 위대한 민족으로 한국인을 치켜세운 후 근면함과 철저한 규율을 기반으로 한국이 세계적 기술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 기업의 대규모 투자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프라보워가 이 속담을 이번 행사에서 처음 꺼내지는 않았다. 이전 연설에서도 그는 이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 그럼에도 굳이 롯데 공장 준공식에서 이를 다시 거론한 배경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며칠 뒤 그 이유가 명확해졌다. 인도네시아 전임 대통령 수하르토가 국가 영웅으로 공식 추대된 것이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프라보워는 연설을 통해 수하르토의 공적을 높이 들어 올리고, 그의 부족함을 깊이 숨겨버리자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한 셈이었다.
수하르토는 1967년부터 1998년까지 30여 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다. 긴 재임 기간이 보여주듯 그는 군부를 기반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한 독재자였다. 그가 정치권으로 등장하게 된 과정에서도 독재적 성향이 드러났다.
육군 소장이던 수하르토는 1965년 발생한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현재까지도 그 배경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을 그는 공산당의 소행으로 지목한 후 공산당과 그 동조자에 대해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이후 각 지역에서 진행된 척결 과정을 통해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당시 대통령이던 수카르노를 압박해 권력을 넘겨받았으며 1968년 대선을 통해 이를 합법화했다. 이후 7차례 선거에서 승리하며 1998년까지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억압하고, 민주적 정치 활동을 제한하며,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감시체계를 구축하면서 철권통치를 확립했다. 정치적 자유 대신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그는 통치 기간 중 연평균 7%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그 결과 기아선상에 놓여 있던 국민 중 상당수가 최소한 하루 세 끼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었다.
일반인의 생활 수준이 일정 정도 향상되었다면 수하르토 가족 그리고 그와 결탁한 엘리트의 재산은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이들은 경제의 핵심 부문을 장악한 후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타임지 추정에 따르면 수하르토 일가의 재산은 150억 달러에 이를 만큼 거대했다. 개인적 축재를 넘어 그는 부패와 연줄을 경제의 핵심 원리로 고착시키는 구조적 문제를 야기했다.
영원히 지속될 듯하던 수하르토 체제는 1997년 동남아시아 금융 위기와 함께 붕괴했다. 루피아 가치 폭락, 급격한 인플레이션, 대규모 실업 등 국가적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정치경제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998년 자카르타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반정부 시위가 동시다발로 전개되자 결국 그는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퇴진 후 이어진 극심한 사회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수하르토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고 그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 문제를 빌미로 그는 검찰 조사를 거부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기소가 시도되었지만 모두 흐지부지되었고, 그는 2008년 사망할 때까지 어떤 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다. 사망 후에도 그의 부정부패와 인권탄압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정부에 의해 수용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국가 영웅으로의 추대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긍정적인 방향에서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프라보워가 수하르토의 영웅 추대를 지지한 이유는 두 사람 관계를 보면 이해될 수 있다. 수하르토의 딸과 결혼한 이력이 말해주듯 프라보워는 오랫동안 수하르토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독재의 핵심을 구성했다. 이런 행보는 수하르토 하야 직전까지 이어져 그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활동가 수십 명을 납치해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런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면 프라보워의 수하르토 지지는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은 상당수 일반인 역시 수하르토의 영웅 추대에 호의적이라는 사실이다. 두 개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각각 84.3%, 80.7%의 응답자가 영웅 추대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반대 의견을 밝힌 응답자는 8.1%와 15.7%에 불과했다.
현재 인도네시아 사회가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어려운 억압적 상황에 놓여 있다면 높은 지지율을 어느 정도 설명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그렇지 않으며 해당 설문 역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보기 어렵다. 따라서 높은 지지율은 일반인의 인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여론조사와 더불어 보다 자유로운 의견 표출이 이루어지는 소셜미디어의 반응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련 콘텐츠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페이스북 게시물의 80%, 틱톡의 77%, 유튜브의 62%, 인스타그램의 56%가 수하르토의 영웅 추대를 긍정적으로 취급했다. 부정적 내용의 콘텐츠는 페이스북에서 9%, 틱톡에서 12%에 불과했다. 트위터(X)에서는 부정적 콘텐츠가 63%로 높게 나타났는데 오히려 이 사례가 예외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셜미디어 활동에 젊은 세대가 훨씬 적극적임을 고려하면, 프라보워가 언급한 속담이 이들 사이에서도 상당 부분 공감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인도네시아에서 과거사 문제가 부상했다가 흐지부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자바 농촌에서 조사하던 시절의 경험이 떠오르곤 한다.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사이가 좋았던 내 하숙집과 그 이웃집 사이에서 일어났다. 두 가족은 행사 때마다 서로를 도왔고, 자주 음식을 주고받았으며, 양쪽 집 청소년의 왕래 역시 빈번했다.
늦은 오후 하숙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날 따라 두 집 사이의 좁은 골목에는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웃집 아이가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집 가까운 쪽만 쓸고 있었다. 두 집 사이에 담장이 없었기에 골목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깨끗하게 정리되었지만 다른 쪽은 나뭇잎이 그대로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청소를 대충 하면서 넘어가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골목의 폭이 매우 좁아서 조금만 더 쓸면 골목 전체를 청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 이유를 묻자 아이는 얼버무리는 듯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나 질문을 계속하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30여 년 전 두 집안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있었으며 그 후 이웃집 영역을 청소하지 않는 관행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두 집 사이에는 심각한 과거사가 존재했다. 수하르토 등장 후 전개된 혼란기 동안 한 가족은 가해자, 다른 가족은 피해자가 되었는데 피해자 쪽 구성원이 체포된 뒤 감옥에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두 가족 사이에 표면적으로 유지되는 친밀한 관계와 일상에서 사소한 방식으로 지속되는 과거의 기억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조사 마을에서 관찰한 하나의 사례를 수하르토 영웅 추대에 대한 높은 대중적 지지와 연결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 기억에 얽매여 현재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으려는 마을 주민의 태도는 프라보워가 말한 높이 들어 올리고 깊이 숨겨버린다는 속담과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수하르토 영웅 추대에 대한 높은 지지도는 이러한 역사 인식이 일반인에 의해 상당 부분 공유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거사 문제를 대하는 방식에서 인도네시아는 우리와 달라 보인다. 역사의 어두운 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거를 파헤치기보다 현재에 초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 역시 상당수 존재한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 잣대가 아닌 그들 삶의 맥락에서 우리와 차이 나는 역사 인식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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