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계엄 유발 책임론' 얽매여
‘오죽하면’과 ‘아무리 그래도’는 잘못된 행동을 대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 행동을 이해하고 정당화할 만할 때는 ‘오죽하면 그랬겠느냐’고 한다. 반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정당화할 수 없을 때는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 있느냐’고 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폭거가 오죽했으면 계엄으로 맞섰겠느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계엄이 웬 말이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의힘은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내홍을 겪고 있다. 지도부는 ‘오죽하면’ 쪽이고, 일부 의원들은 ‘아무리 그래도’ 쪽이다. 국민의힘이 ‘오죽하면’에서 벗어나 ‘아무리 그래도’로 갈 수 있느냐에 당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지난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을 맞아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계엄은 민주당의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의 폭거가 계엄을 유발했고 계엄 선포는 그 폭거를 막기 위한 불가피하고 정당한 조치라는 뜻이다. 윤 전 대통령도 변호인을 통해 “12·3 비상계엄은 국정을 마비시키고 자유 헌정 질서를 붕괴시키려는 체제 전복 기도에 맞서, 국민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한 헌법 수호 책무의 결연한 이행”이라고 주장했다.
‘국정 마비’ 와 ‘자유 헌정 질서 붕괴’의 주체를 민주당으로 보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장 대표는 계엄 선포에 대해 윤 전 대통령과 똑같이 민주당의 ‘유발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계엄 유발 책임론’은 계엄 선포를 ‘오죽하면’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뜻한다.
장 대표는 계엄 선포에 대한 명시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윤석열과의 절연도 거부하고 있다. 장 대표는 이에 대해 나름의 정치적 전략적 이유를 말하고 있다. 계엄 선포를 사과하고 윤석열과 절연하겠다고 하면 민주당이 오히려 ‘내란 정당’ 몰이에 더 힘을 쏟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성 지지층의 결집을 굳건히 한 뒤 중도층 지지 확보라는 외연 확장에 나서는 게 효과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계엄 선포를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계엄 선포가 민주당의 폭거에 맞서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본다면 사과하고 절연할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잘 알려진 대로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 3년 동안 입법 독주를 일삼고 탄핵 소추를 남발했다. 국민의힘 강성 지지자들은 이런 민주당의 행태를 국정 발목 잡기 또는 국정 방해라고 비판하면서 ‘오죽하면’ 계엄을 선포했겠느냐고 여긴다. 장 대표는 이런 사람들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입법독주와 탄핵 남발을 비판하면도 계엄은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아무리 야당이 국정을 방해한다고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계엄을 선포하느냐고 한다. 중도층 다수가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일상사에서는 ‘오죽하면’이 옳을 때도 있다. 휴지를 주우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할머니와 사는 어린 초등학생이 배고픔을 못 이겨 편의점에서 빵 한 개를 훔쳤다고 치자. 대부분 오죽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느냐며 이 학생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빵을 훔친 행위 그 자체보다 빵을 훔치게 된 절박한 사연에 주목한다.
하지만 층간 소음으로 고통을 준다고 윗집에 불을 지르거나 흉기를 휘둘러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오죽했으면’ 하고 넘어갈 수 없다.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하게 된다. 층간 소음에 시달린 사연보다는 불을 지르거나 흉기를 휘두른 행위에 더 주목한다.
관건은 행위가 얼마나 엄중하냐이다. 그렇게 행동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행위가 너무나 엄중하면 ‘오죽하면’은 통할 수 없다. 며칠을 굶어 배가 고팠다고 하더라도 편의점 주인을 칼로 찌르고 물건을 뺏는다든지, 빵을 큰 가방에 통째로 쓸어담아 간다든지 하면 그 행위는 엄중하다. 이런 때는 ‘오죽 배가 고팠으면’이라는 말은 쓸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한다. 이게 인지상정이다.
'아무리 그래도 계엄이라니'가 민심
이처럼 ‘오죽하면’은 불가피한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통용될 수 있다. ‘오죽하면’을 남용하면 저마다 나름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게 된다. 도덕의 기준이 무너지고, 불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수 있다. 형법에서 처벌이 면제되는 정당방위를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당방위를 너무 쉽게 인정하면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남을 해치는 일이 예사로 일어날 수 있다. 그리 되면 사회의 안녕질서는 세워질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데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더불어민주당의 ‘폭거’가 심했다고 하더라도 비상계엄으로 맞서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오죽하면’이 통할 수 없다. 국민의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계엄 선포 1주년날 계엄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계엄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반헌법적, 반민주적 행동”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낸 김용태 의원은 “계엄은 보수의 가치와 태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장 극단적 행위였다”고 했다. 김대식 의원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깊은 상처를 입었던 순간이었다”라고 했다. 계엄 선포를 규탄한 의원들은 계엄 선포가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를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 부정’보다도 더 엄중한 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권영세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야당의 입법 독재와 폭주가 아무리 심각했다 하더라도 계엄 선포는 결코 해서는 안 될 잘못된 선택이었다”라고 했다. 권 의원 말은 계엄 선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의 핵심을 찔렀다. ‘아무리 그래도’라는 시각을 잘 보여줬다. 아무리 민주당이 의회 폭거로 국정을 방해하고 발목 잡기를 하더라도 계엄으로 맞설 일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 민주당을 포용하고 대화로 풀어나가야 했다.
적대적으로 나오는 야당과 대화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재명 대통령도 계엄 1주년 외신 기자 회견에서 “가끔 (야당과) 대화를 해보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넘어 화가 날 때가 상당히 있다”며 “대화 자체가 안 될 때도 꽤 많다”고 했다. 특히 야당의 공세에 대해 “저게 말이 되는 소리야? 우리 국민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소리를 저렇게 공개적으로 왜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며 “속으로는 차라리 정파적으로 생각하면 ‘잘됐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야당과 포용하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본질이고 정치 지도자의 숙명이다. 이는 야당의 공세를 비판한 이 대통령에게도 똑같이 해당한다. 그가 얼마나 정치의 본질과 정치 지도자의 숙명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지에 대통령으로서의 성패가 달려 있다. 윤석열은 그런 본질과 숙명을 외면하고 계엄으로 맞섰다. 층간 소음을 일으킨다고 윗집에 불을 지른 꼴이다. 그 결과 패가망신에 가까운 치욕을 겪고 있다.
중도층 잡으려면 새로운 리더십 나와야
요즘 국민의힘 지지도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무당층의 비율보다도 낮다. 지난 11월 14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무당층 비율은 27%였다. 국민의힘 지지도는 24%로 무당층보다 3% 포인트 낮았다. 더불어민주당 지지도는 42%였다. 같은 달 13일 엠브레인 퍼블릭·케이스탯 리서치· 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4사(社)가 공개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도 정당 지지도는 태도 유보 27%, 국민의힘 21%로 나타났다. 민주당은 42%였다.
무당층이나 태도 유보층이 국민의힘 지지율보다 높다는 조사 결과는 국민의힘이 지지층을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크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국민의힘이 하기에 따라 국민의힘 지지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은 이들을 잡지 못하고 있다. 몇몇 여론조사에서 당의 지지율이 20%대 초반에 머물러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중도층 붙잡기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갤럽 10월 5주차 조사에서 중도층의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43%)이 국민의힘(15%)을 세 배 가까이나 앞섰다.
지난 대선 직후인 6월 2주차 조사에서도 중도층 지지율은 민주당 47%, 국민의힘 15%였다. 그 사이 국민의힘은 8월 전당대회에서 새 지도부가 출범했다. 민주당은 사법부 압박, 부동산 대책 실패, 대장동 항소 포기, 일방적 국정 운영 등 악재가 쏟아졌다. 하지만 중도층의 국민의힘 지지율은 15% 선에 묶여 있다.
국민의힘이 중도층을 잡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엄 사태에 대해 국민 눈높이를 따르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도층을 비롯한 다수 국민들은 계엄을 ‘아무리 그래도’라는 시각에서 보는데 국민의힘 지도부는 여전히 ‘오죽하면’의 시각에서 보고 있다. 그러니 중도층이 국민의힘에 마음을 줄 수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아무리 국정 운영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해도 무당층으로 남아 있을지언정 국민의힘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이제 국민의힘이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계엄 선포에 대해 ‘오죽하면’에서 벗어나 ‘아무리 그래도’라는 민심을 따르는 것이다. ‘오죽하면’에 빠져 있으면 국민의힘에 미래가 없다는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성 지지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 리더십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올 것이냐가 관건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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