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평범함을 기적이라 믿으며 살아온 '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의 다리를 잃는 재난을 맞닥뜨린다. 김히어라는 이 여자의 절박한 마음을 따라가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 있다"는 감각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춘서는 기적들을 원하는 인물이에요. 그가 바라는 기적은 '평범함'이죠. 그는 남편과 아들을 떠올리며 푱범하게 사는 삶을 기도 했을 거예요. 그러다 재난처럼 저주를 맞닥뜨리게 되고 민재의 다리를 잃고부터는 '민재를 찾겠다'에만 매달리죠. 춘서의 삶을 보며 저와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히어라로서 느낀 점들이 많았죠. 지금 건강한 것, 눈뜨는 것, 햇빛을 보는 것… 그게 기적이구나. 우리가 바라는 '더 큰 기적' 때문에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이요."
지난해 학폭 논란으로 모든 활동이 중단됐던 김히어라는 이후 당사자들과의 조율 끝에 공식적으로 사안을 종결했다. 조용히 한국을 떠난 그는 계획과 목적 없이 미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간은 배우로서 다시 서고 싶다는 마음을 더 확실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갔어요. 영어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그냥 공부하는 것보다 익숙한 장르 안에서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뮤지컬 프로그램에 들어갔어요. LA에서 음악 작업도 했고요. 제 감정을 가사로 쓰기도 했는데 그 시간이 좋았어요. 힘들었지만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결국 돌아갈 곳은 연기구나. 음악을 해도,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이걸 언젠가 연기에 써먹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걸 해볼까 고민한 적이 없더라고요. 절실함이 생겼고 그게 '춘서'를 연기할 때 자연스럽게 묻어났던 것 같아요. 예전 같았으면 캐릭터를 데이터로 이해했을 텐데 이젠 더 많은 사람을 공감할 수 있게 된 느낌이에요."
김히어라는 영화 '구원자'에서 절박한 엄마 '춘서'를 연기한다. 사이비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처럼 보이지만, 그는 시나리오를 여러 번 읽으며 이 영화가 결국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발견했다. 춘서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지만 등장할 때마다 서사의 방향을 바꾸는 인물이기도 하다.
"처음엔 종교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두세 번 다시 읽으니까 관객들이 영범, 선희, 춘서의 입장에서 다 다른 영화를 볼 수 있겠더라고요. 누가 중심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각자의 의견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춘서는 서포트처럼 보이지만 나올 때마다 극적인 순간에 서 있는 인물이라 쉬운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도전적이었고, 그게 매력적이었어요."
특히 그는 춘서가 서사 속 소모적인 역할이 되지 않도록 감독과 수없이 토론하며 캐릭터의 결을 새로 설계해 갔다.
"처음 설정은 '시골에 사는 나이 있는 미혼모'였어요.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했을 때 신선함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연령대를 낮추자고 했어요. 리프팅 의미가 아니라 비주얼적인 젊음보다는 '미성숙함'이 필요했어요. 춘서는 고아였고 의지할 사람이 아들뿐이에요.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존재인데 오직 아들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죠. 그런 위태로움과 불안정함이 더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고딩엄빠 프로그램도 많이 봤고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찾아봤어요.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삶들 속에서 오는 감정이 춘서에게 필요했거든요."
김히어라는 '춘서'를 통해 자신의 욕망과 불안, 모성의 절박함을 새롭게 꺼내 보인다. 특히 한 신에서 빨간 목폴라를 입은 장면은 그의 제안에서 출발했다. 상대 역인 '선희'(송지효)가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캐릭터라면, 춘서는 아직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김히어라는 그 대비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피팅할 때 디자이너 선생님이 그랬어요. '이건 꼭 신에 입었으면 좋겠다'고. 선희는 점점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지만, 춘서는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빨간 목폴라를 입으면 그 눈이 더 탐스럽게 보일 것 같았어요. 선희에게 욕망이 생기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그래서 제 눈을 더 초롱초롱하게 부탁하기도 했어요."
그는 춘서를 단순히 강한 인물이 아니라, 미성숙함과 유약함이 공존하는 사람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춘서에게 유약한 모습도 넣고 싶었어요. 강한 연기력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아 저 배우 계속 보고 싶다'는 감정이 들면 감사할 것 같아요."
눈빛은 춘서라는 인물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도구였다.
"눈동자 색이 밝은 갈색이라서 감독님이 좋다고 하셨어요. 상황 설명이 많은 캐릭터가 아니라서 톤이나 눈빛으로 살아온 결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강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까 또 강하게만 갈까 걱정했는데 감독님이 '우영우'에서 모성적인 모습 본 게 있어서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김히어라는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복귀 과정이 불편하거나 무거웠을 법하지만 현장에서 함께한 김병철·송지효는 그를 있는 그대로 동료로 대했다.
"두 분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전투적으로 집중해야 하니까 오히려 가볍게 대해주셨어요. '앉아 있어,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야' 하면서요. '너는 계속 할 수 있어, 좋은 배우야' 이런 미래 지향적인 말도 많이 해주셨고요. 배우로서 동등하게 대해주니까 사적인 건 금방 잊히고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김히어라는 '구원자'를 자신의 인생에서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단순한 복귀작을 넘어,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짧게 느껴졌어요. 시간이 금방 갔고요. 이 작품 이후에 바빠질 수도 있고, 또 일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근데 그럴 때마다 '구원자'는 특별할 것 같아요. 터닝 포인트, 새로운 챕터라고 해야 할까요. 제목도 좋고, 기적을 찾아가는 이야기 자체가 저랑 닿아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어떤 장면들은 아마 오래 기억에 남을 거예요."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지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한 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화려함보다 '신뢰'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꺼냈다.
"담대하게, 무탈하게요. 예전엔 그게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래요. 어떤 작품에 참여했을 때 다는 아니어도 '김히어라가 이 작품을 선택한 데엔 이유가 있구나' 그렇게 느껴지는 배우였으면 해요. 신뢰가 쌓였으면 좋겠어요. 연기를 귀하게 하고 싶어요. 대단한 나날이 아니라 무탈한 나날이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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