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태윤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글로벌전략·정보학과 겸임교수]
한미정상회담이 당초 우려와는 달리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와 트럼프 정부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정책이 공동가치를 위한 화학적 결합을 시작하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칭찬 외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대통령이 먼저 일본에 들러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발전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한 후, 미국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미·일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 미국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달라. 피스메이커가 되어달라”는 화술로 트럼프 대통령을 흡족하게 만들었으며, 트럼프도 “김정은을 올해 만나고 싶다”라는 속마음을 내보였다. 향후 트럼프와 김정은 간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이 커졌다. 또한, 이 대통령은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강연에서 “한국이 과거처럼 ‘안미경중(安美經中)’을 취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이재명 정부가 ‘미국에 무게 중심을 두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지난 한 주는 한미정상회담으로 서울과 워싱턴 D.C.에서 뜨거운 열기가 넘쳤다. 그러나 이제 세계 각국의 관심이 9월 3일 중국에서 열리는 전승절 80주년 열병식 행사에 쏠리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 김정은 국무 위원장이 중국 시진핑 주석,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함께 참석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동북아에서 트럼프 정부와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어, 이 행사를 친중국 국가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자리로 활용할 것이다.
중국, 북한, 러시아의 동상이몽 속마음을 깊숙하게 들여다보자.
중국 입장을 먼저 살펴보겠다. 시진핑 정부는 최근 미 정부가 거론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대만해협, 안미경중 등 현안에 신경을 곤두세워왔으며, 한국에 “미·중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압박해왔다. 중국 언론은 이 대통령의 안미경중 불가능 발언에 “한국 운명을 위험한 전차에 묶는 것이다”라며 불만을 표출했다.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편에 선 이재명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북·중 관계 증진이라는 카드를 꺼낼 것이며 북한에 경제지원 등 선물 보따리를 줄 것이다.
시진핑 정부는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으로 미국과 동맹국 간에 틈새가 생길 것이며, 진보성향을 띈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외교 정책이 트럼프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촉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한·미 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한·미·일 협력관계도 바이든 전 정부 때와 같이 계속 유지되자 중국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시진핑은 새로운 한미동맹 관계에 대비하고자 북·중·러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료되면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을 설득하여 중국 견제를 시도할 것으로 본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방지하고자 동북아에서 북·중·러와 한·미·일 간 대결 구도를 만드는 포석을 놓고 있으며,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우군 세력을 확보해 기세 싸움을 벌이고자 한다.
중국은 미북정상회담에 대비하여 북한과 의견을 교환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재명 대통령이 ‘3단계 비핵화’라는 한반도 비핵화 구상을 밝혔으며, 트럼프 대통령도 김정은과 만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과거 6자회담이나 미·북 회담에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왔기에, 이번에도 큰 틀에서 김정은과 입장을 정리할 것이다.
반면 북한은 트럼프 1기 정부와 미북정상회담을 두 차례 가진 바 있다. 김정은도 지난해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길 바랐을 것이다. 북한은 트럼프가 미·북 회담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협상 조건이다. 김정은은 바이든 전 정부에서 핵 무력화 정책을 헌법에 명기했다.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다. 북한은 한국을 ‘적대적 국가’로 규정하였으며 상대하지 않겠다고 한다. 통미봉남 전술로 미·북 협상에서 한국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북한은 뒷배인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의 지지를 받아 미·북 협상 시 비핵화 대신, 핵 군축을 관철하려는 속셈이다. 북한은 러시아와 밀착 관계를 유지해왔다. 군사조약을 체결했으며, 러시아에 북한군을 파병하여 서방국가와 대결해왔다. 김정은 정권이 지난 몇 년간 중국과 소원한 관계를 보였는데, 이번에 만회하려 들것이다. 중국에 경제지원도 요청할 것이다. 북한은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중국·러시아의 지원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김정은이 중국 전승절에 등장하는 모습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김정은이 다자외교 무대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중국, 러시아, 미국과의 양자회담에 주력해왔다. 그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북한이 핵 무력화를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중국·러시아 이외의 국가들까지 외교활동 외연을 확장하여 핵 보유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의도이다.
한편, 러시아는 러·우 전쟁 휴전 문제를 놓고 트럼프와 담판해야 하는 처지로 협상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중국 등 지지 세력과의 밀착된 모습을 과시하는 것이 절실하다. 푸틴은 북한과 체결한 군사조약을 빌미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속내를 갖고 있다.
북·중·러 3국 정상이 중국 전승절에 회동하는 이유를 종합해보자.
첫째,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반미세력이 함께 모여 미국 등 서방국가와 기세 싸움을 벌이기 위함이다. 둘째, 동북아지역에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대결 구도를 확실하게 구축하려는 의도이다. 셋째, 향후 개최될 미·북 회담을 위해 중국, 러시아, 북한 간의 공조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문재인 전 정부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미북정상회담을 이끌었던 것처럼, 이재명 정부도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동력으로 하여 미북정상회담 2라운드를 만들어 내려는 것 같다. 김정은만 호응한다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성사되었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이벤트성 깜짝 만남이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미·중 관세보복, 러·우 전쟁 종식 문제에 직면하고 있어 미·북 협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미·중 간 관세전쟁이 종료되지 않았으며 북한군이 참전하는 러·우 전쟁도 진행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러시아와의 문제를 먼저 정리해야만 북한 비핵화 이슈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정부는 향후 북한과의 협상에 있어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트럼프 정부가 만일 김정은 정권과 핵 군축 협상을 추진하여 북한 핵을 용인해 버릴 경우,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반드시 북한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
엄태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국어대 국제관계학 박사 △Pace 대학 경영학 박사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 △주 보스턴 총영사관 영사 △통일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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