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금융시장에서 거래소의 존재는 필수다. 거래소가 있어서 우리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주식과 여러 금융상품을 사고 팔 수 있다. 거래 상대방이 대금 지급이나 증권 양도 등 결제책임을 이행하지 않아도 거래소(청산소)와 그 회원이 결제 책임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래소를 통한 거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거래조건의 표준화가 필수적이다. 거래대상, 거래단위, 결제월, 가격표시방법, 최소호가단위, 가격제한폭 등 제반 거래조건이 정형화·표준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시장 참가자가 동일한 조건에서 거래할 수 있어 거래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거래소에서 주문을 내는 회원들마다 상품에 대한 취급이 달라지면 투명하고 효율적인 거래는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모든 거래소들은 상품마다 상세한 규정을 두어 회원과 그 고객들에게 이를 준수하도록 요구한다.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장내상품이면 주식, 채권은 물론 파생상품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거래소의 코스피200 옵션 규정을 보면 그 회원인 증권회사들이 고객과 맺는 계약의 내용까지 상세히 정하고 있다. 외국 증권회사에도 동일하게 규정을 준수하도록 요구한다. 장내상품의 특성상 필수적인 것이므로 해외 거래소도 마찬가지다. 오사카거래소 역시 닛케이225 옵션 거래를 하는 국내외 증권회사와 고객에게 거래소 규정의 준수를 요구한다. 미국의 시카고상품거래소(CME)도 그렇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증권회사가 국내 약관을 이유로 해외 거래소 규정을 무시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닛케이225 옵션은 유럽형이므로 옵션 매수자가 만기에만 권리행사를 할 수 있다. 만기 전에 옵션가격이 아무리 변해도 만기에 기초자산가격이 행사가격에 비해 불리하지 않으면 매도인은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한 증권회사가 옵션가격 변동을 이유로 고객의 닛케이225 옵션 포지션을 모두 강제청산 했다. 투자업계에 충격을 주었음은 물론 결국 소송으로 비화되었다. 서울고등법원은 위와 같은 강제청산이 위법하다고 봤다. 그러나 올 3월 대법원은 다시 2심 판결을 뒤집어 적법하다고 봤다. 유럽형 옵션임에도 옵션가격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해 만기에 결제책임을 이행하지 못할 수 있으니 그런 강제청산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오사카거래소는 옵션가격의 등락으로 평가손실이 발생해도 이를 고객이 납부할 증거금 산정에만 반영할 뿐 증권회사의 강제청산 사유로 허용하지 않는다. 금융투자협회 표준약관은 증권회사와 회원이 그러한 해당 거래소의 규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있음에도 국내 증권회사는 오사카거래소가 허용하지 않는 강제청산을 한 것이다.
대법원에서 국내 증권회사가 해외 거래소에서 허용하지 않는 강제청산을 하는 것이 적법한지 여부는 판단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대법원이 위와 같은 해외거래소 규정 준수 여부에 관한 문제까지 고려해서 판단한 것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최고 법원이 한국 증권회사는 해외 거래소 규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해외 거래소는 이제 한국의 증권회사들이 거래소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정형화·표준화가 생명인 거래에서 한국만 예외를 허용해야 하는 상황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받아들여질까? 국제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한국만 예외를 허용해주기보다는 한국을 외면하지 않을까?
우리 정부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기치로 글로벌 금융회사를 만들고, 동북아 금융허브 국가가 되겠다는 정책을 오래 전부터 추진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 증권회사는 해외 거래소 규정을 무시하고 최고 법원도 이를 허용한다고 하면, 그 사실이 국제 금융시장에 알려지면 우리 정부의 정책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금융허브는커녕 한국은 국제 금융시장의 갈라파고스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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