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도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논설고문]
최근 몇 년간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이 국가 정책의 핵심 의제로 부상했지만, 현실적으로 기업 및 경제 성장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여러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2050 탄소중립선언’, '탄소중립 녹색성장기본법' 제정 등 다양한 기후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산업계는 규제 중심의 접근, 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 그리고 정책의 일관성 부족 등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산업 경쟁력을 고려한 ‘기업 친화적 기후정책’으로의 전환을 통해 경제성장과 탄소감축을 조화롭게 추진하기 위해서, 새 정부는 어떻게 복잡한 과제들을 풀어나가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성장과 기후대응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동안 기후 정책은 단기적 목표에만 집중하거나 정부부처 간 협력이 미흡하여 산업 현장에서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또한 규제 및 지원 정책의 잦은 변경은 기업의 중장기 투자 결정을 어렵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산업 구조는 에너지집약적 산업의 비중이 높아 탄소감축 목표가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 적용되는 경우가 많아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자동차 산업 등이 높은 감축 부담을 안고 있다.
탄소감축 목표는 산업별 특성과 경제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설정해야 한다. 기업의 감축 부담을 최소화하고, 신산업 육성을 통해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특히 지금은 AI, 데이터센터 등 다전력 소비형 미래 핵심산업의 발전을 고려한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핵심 소재(배터리 원료, 반도체 소재, 희토류 등)의 공급망 리스크 또한 정책수립 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투자 활성화에 필수적이다.
둘째는 일방적 규제 중심에서 인센티브 중심으로의 정책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동안 기후대응 정책은 정부가 ‘탄소감축목표(NDC)’를 설정하고 기업에 강제적인 감축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다. 이는 탄소배출 규제나 환경법규 강화로 이어져, 기업의 생산비용 증가와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재생에너지 의무 할당제나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등의 정책은 산업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방해하고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킨 대표적인 규제 사례이다.
강제적인 감축 목표보다 세금감면, 보조금, 기술개발 지원 등 인센티브를 통해 기업의 자발적인 감축을 유도해야 한다. 탄소 배출이 적은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확대하여 친환경 산업투자를 촉진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대기업에 비해 자금과 인력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탄소감축 기술도입과 친환경 설비투자를 적극 독려해야 한다.
셋째 기업의 부담을 완화하고, 기술개발과 인력양성 투자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특히 수출 주도형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민감하다. 심지어 탄소배출권 가격 상승이 기업의 생산 비용을 증가시켜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탄소배출권 거래제의 가격 변동성을 완화하고, 기업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
새 정부에서도 탈탄소 신기술 개발과 전문 인력 양성에 대한 투자는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 장기적 산업경쟁력 확보를 위해 핵융합 발전, 차세대 원전(SMR), 탄소포집 및 저장(CCUS), 수소경제 등 핵심 신기술 개발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또한 RE100과 같은 국제 기준을 충족할 수 있도록 국내 신재생에너지 인프라 확충에도 노력해야 한다. 탄소감축 목표를 국제적인 기술 협력과 연계하여 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넷째 미래의 핵심 기술발전을 고려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화석연료와 원전과의 적절한 균형을 고려한 에너지믹스를 설계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적인 특성은 배터리, 수소 등 추가 저장시설을 필요로 한다. 탄소중립 목표를 단계적으로 설정하고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한 후 기존 에너지 축소를 추진해야 한다.
특히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증가와 그로 인한 전력 인프라 및 전력망 과부하, 그리고 냉각을 위한 물 사용량 급증 등의 문제는 미래의 전력정책과 기후변화 정책 수립에서 핵심적 고려사항이다. 미래 산업의 핵심인 AI 연산을 위한 데이터센터의 높은 전력 소비구조를 고려할 때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절대적이다. 챗GPT 1회 검색 요청 시, 구글 검색 대비 10배나 많은 전력이 소모된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AI 기반 데이터센터의 수요는 2030년까지 지속적으로 연평균 15~20% 증가가 예상되며, 실제로 ‘22년 버지니아주 ’데이터센터 앨리’ 지역에서는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급증에 따른 과부하로 인해 신규 전력 연결을 중단하는 조치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과도한 열을 배출하는 데이터센터 냉각을 위한 물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27년까지 연간 66억m³의 물 소비가 예상된다.
결론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산업정책 관점에서 보면 급격한 탈탄소 전환은 산업 경쟁력 약화, 고용 불안, 지역 경제 침체 등 새로운 사회·경제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와 높은 수출 의존도를 고려할 때 무리한 규제 강화나 일방적인 정책 추진은 산업 성장과의 균형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이제는 단순히 감축 목표를 제시하는 것을 넘어 산업별 현실을 충분히 반영한 맞춤형 정책, 중소기업의 친환경 설비전환 지원, 기술혁신 생태계 조성, 인력양성 등을 통해 산업정책과 기후대응의 정책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는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기업은 혁신과 전환의 주체로서 적극 대응해야 한다. 기후변화 대응과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지혜로운 정책 설계와 사회적 합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김학도 필자 주요 이력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전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통상교섭실장 △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현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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