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5) 베트남의 초특급부자들 …그들은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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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입력 2024-01-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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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포브스>는 금년 초 10억 달러 이상 자산을 가진 세계 최고 부자들인 ‘유에스 달러 빌리어네어스’ 명단에 베트남 최고 부자 다섯 명을 올렸다. 빈 그룹의 팜녓브엉, 비엣젯 항공의 응우옌티프엉타오, 호아팟 철강그룹의 쩐딘롱, 쯔엉하이 오토(Thaco)의 쩐바즈엉, 테크콤 뱅크의 호훙아인이 그들이다. 2019년부터 이 명단에 있던 마산 그룹의 응우옌당꽝은 이번에 빠졌다. 팜녓브엉이 2013년 빌리어네어스 명단에 가장 먼저 올랐고, 베트남 부자들이 이 명단에 아홉 명까지 오르기도 했다. 노바랜드의 부이타인년, 선샤인 그룹의 도아인뚜언, VP뱅크의 응오찌중도 빌리어네어스 명단에 올랐던 최고 부자들이다.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서 이들은 어떻게 세계적 부자가 됐을까? 자못 궁금하다.
 
 탈사회주의 개혁 과정에서 부자가 되는 길
 
사회주의 국가가 탈사회주의 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본가, 즉 기업인이 탄생하는 길은 일반적으로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개혁 이전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산당 고위 지도자, 정부 고위 관료 또는 국영기업 고위 관리자가 부를 축적하여 ‘붉은 자본가(red capitalist)'가 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민간인으로서 개혁 과정에서 생기는 기회를 잡아 부를 축적하는 민간 기업인이다. 그간 러시아 및 동유럽의 올리가르히처럼 탈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붉은 자본가의 등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민간 대기업의 기업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돼 왔을까?
베트남에도 붉은 자본가들이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짐작하지만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붉은 자본가들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는 게 일반적이다. 베트남에서도 1990년대부터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는 비효율적인 기업을 파산하거나 기업 간 합병하는 방식도 있었지만, 주식회사로 민영화하는 방식이 대세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은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전면적 민영화가 아닌 부분적 민영화를 시행했다. 그 방식은 정부가 국영기업 주식 일부를 여전히 보유하고, 일부를 기업 종사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판매하고, 일부를 외부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민영화 방식은 ‘사유화’가 아니라 ‘주식화’ 또는 ‘주식회사화’라고 불렸다. 초기에 민영화된 중소기업에서 일반인에게 판매되는 비중이 높았으나 후기에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국영기업에 대해서는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의 주식 보유 비중이 높았다. 이런 민영화 방식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대규모 붉은 자본가가 탄생하는 데는 제약이 있었으나 중소 규모의 붉은 자본가들은 등장했다고 여겨진다. 민영화 과정에서 기존의 기업 관리자들은 닥쳐올 시장경쟁에 대한 우려로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에게 이권을 많이 준 경우에는 민영화 과정이 빨리 진전되기도 했다. 정부 관련 부처의 고위 관료나 국영기업 고위 관리자들은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예컨대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서쪽에 위치한 옛 푸자 호텔은 민영화가 빨리 진전된 사례였다. 전직 고위 관료들이 하노이에서 첫 고급 주거지로 개발된 씨뿌짜의 고급 빌라들을 여러 채 소유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의 부를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한편 베트남에서 민간인으로서 대기업을 일으킨 기업인들은 어떤 경로로 등장했을까?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호찌민시에서 시장경제화의 기회를 잡은 국내파고, 다른 부류는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시작해 국내로 돌아온 귀국파다. 이들 민간인 출신 사업가들도 공산당 및 정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1960~1980년대 한국의 고성장 시기 정경유착의 베트남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팜녓브엉의 빈 그룹이 호찌민시에 세운 랜드마크 81
[팜녓브엉의 빈 그룹이 호찌민시에 세운 랜드마크 81.]



국내파 민간 기업인의 성장
 
베트남이 1975년 통일된 후에도 남부, 특히 호찌민시에는 민간 경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한 가구 또는 그보다 조금 큰 규모의 상업과 소규모 제조업을 담당했다. 이러한 남부 자본주의 체제의 유산은 개혁 과정에서 민간기업 성장의 환경을 제공했다. 호찌민시에는 1990년대 초부터 민간 기업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몇 명의 사례를 들어보자.
반틴팟 그룹의 쯔엉미란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는 레스토랑과 상업으로 시작해 부동산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그는 화인으로서 홍콩인 남편을 통해 사업 수완과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안동 시장 재개발과 윈저 플라자 호텔 투자로 이름을 알렸다. 사이공 상업은행(SCB)을 인수하고 최대주주가 됐다. 그러나 그는 2023년 말 SCB에서 부정 대출을 하는 등 16조원 상당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됐다. 공무원들에게 제공한 뇌물이 67억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호찌민시 정치인들과 교류해왔다고 알려졌다.
도안응우옌득은 중남부 빈딘 출신으로 처음 중부 고원지대에서 학교에 납품하는 책상을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목재가공 사업을 확장하고, 호앙안잘라이 그룹을 설립해 부동산, 고무 가공, 수력발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는 축구학교를 설립하고 프로축구팀을 운영하며 박항서 감독과도 친분이 깊다고 알려져 있다.
쩜베는 남부 메콩 델타의 짜빈 출신 기업인이다. 그는 어릴 때 사이공으로 이주하여 전통시장에서 일했다. 그의 사업은 처음에 목재가공이었고, 이후 건설, 부동산, 금융 부문으로 확장해 사콤뱅크(Sacombank)에 참여했다.
노바랜드의 부이타인년은 메콩 델타의 동탑 출신으로 수의학을 공부한 뒤 독일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 후 호찌민시 지방정부에서 가축 사육과 수의학 분야에 종사하다가 1992년에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처음에 가축용 약품 등을 취급하다가 이후 부동산으로 사업을 확장해 대기업인이 됐다. 그가 독일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지만 사업을 국내에서 시작했기에 국내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귀국파의 성장과 활약
 
개혁 이전 사회주의 시기에 베트남의 일부 인재들은 소련과 동유럽에 유학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귀국 후 관계나 학계에서 활동했지만 개혁정책을 채택한 이후 극히 소수는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했다. 몇몇 사례를 보자.
베트남 기업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가 빈 그룹의 팜녓브엉이다. 현재 그는 포브스의 세계 부자 순위에서 600위대에 랭크돼 있는데 300위대에 랭크되기도 했다. 그는 하노이에서 출생했지만 부친의 고향에 따라 하띤 출신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 말 모스크바 지질탐사대학에서 공부하고 우크라이나로 옮겨 레스토랑을 열었고 라면을 생산하는 식품가공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이후 이 사업을 네슬레에 팔고 귀국했는데, 그의 사업 규모는 당시 1억5000만 달러 규모였다. 그는 귀국 후 부동산 사업에 집중하여 빈펄 리조트, 빈홈즈 아파트, 빈꼼 몰 등 사업을 열었고, 이후 빈멕 병원, 빈스쿨 및 빈유니 교육사업, 빈패스트 자동차 등으로 확장했다.
비엣젯 항공의 응우옌티프엉타오는 하노이 출신으로 플레하노프 러시아경제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 멘델레프 화학기술대학에서 경제관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2년 남편과 함께 러시아에서 소비코(Sovico) 회사를 설립하여 중공업 기계와 물자를 베트남으로 수입했고, 1997년 이래 부동산과 은행 사업으로 확장했다. HDBank, 다낭의 푸라마 리조트, 남사이공의 드래곤시티, 푸꾸옥 리조트 등이다. 프엉타오는 2007년에 비엣젯 항공을 설립하여 베트남의 대표적 저비용항공사를 출범시켰다.
마산 그룹의 호훙아인과 응우옌당꽝은 각각 하노이와 중부 꽝찌 출신으로 러시아에서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식품사업을 베트남으로 들여와 마산 그룹을 설립하여 라면과 간장 생산을 시작한 이래 식품부문 최고 기업으로 만들었다. 호훙아인은 테크콤 뱅크 주식을 사들여 지배지주가 된다. 마산은 베트남 내 최대 식품기업이 됐고 빈 그룹의 빈마트를 인수하기도 했다. 테크콤 뱅크는 베트남 내 최대 민간은행이 됐다.
응우옌득끼엔은 하노이 출신으로 베트남군사기술대학에 입학한 후 헝가리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 졸업 후 국영 베트남섬유의류회사에서 일하며 러시아와 교역하는 데 종사했다. 이후 그는 1990년대에 아시아상업은행(ACB)을 설립하고 다른 몇 개 소형 은행의 경영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그는 2012년에 체포되어 사기, 탈세, 불법 거래 등으로 30년형을 선고받았다.
 
- 부동산과 은행을 통해 성장한 베트남 부자들
 
베트남의 부자들이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면 ‘붉은 자본가’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개혁 이전 사회주의 시기의 공산당 고위 지도자와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개혁 이후 새로운 기업인으로 변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베트남 기업인들은 민간인으로 출발해 시장경제화의 기회를 잡아 대기업인으로 성장했다. 기업인의 성장 과정은 1990년대 국내파의 성장과 1990년대 말 또는 2000년대 귀국파의 약진으로 요약된다. 이들이 대부분 부동산과 은행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베트남 기업인 등장의 길에서 민간의 힘이 국가의 힘을 압도하는 듯하지만 이는 정치와 경제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 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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