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22) 남부 호찌민시와 북부 하노이 …너무 다른 베트남의 한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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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전 서강대 교수
입력 2023-08-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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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교수
[이한우 교수]

 
 
 
한국과 베트남은 작년 12월에 국교 수립 30주년을 맞았다. 그간 양국은 여러 분야에서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진전된 분야는 경제다. 수교 이후 30년간 양국 간 교역은 150배 이상 증가했고 한국은 이제 베트남의 제3위 교역 대상국이 됐다. 베트남에 투자한 외국인 기업의 직접투자액 순위에서 누계로 한국이 가장 앞선다. 투자 프로젝트 수는 2022년 중반에 9000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양국 간 협력 관계가 거시경제 지표로만 제시될 수는 없다. ‘돈’ 흐름뿐만 아니라 ‘사람’ 흐름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 상대국에 거주하는 인구는 각기 2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이주하는 베트남인 여성은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 배우자 출신국 순위에서 상위권에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정되고 2023년에 한국으로 결혼 이주해 온 여성들 가운데 베트남인이 가장 많았다. 한국에서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이 만든 다문화 가정은 공식 통계로는 4만여 가구지만 세간에는 6만가구에 이르렀다고 알려졌다. 최근에는 양국 출신 부부로 구성된 다문화가정이 베트남 내에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이 결혼해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베 가정이 증가하고 있어 그 수는 현재 약 1만여 가정으로 추산된다. 이로써 베트남에는 한국인 공동체, 한국에는 베트남인 공동체가 형성됐다. 얼마 전에 채수홍 서울대 교수가 베트남 내 한인 사회에 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를 참고하여 베트남 내 한인 사회를 들여다보자.
 
베트남 한인 사회의 시작
 
베트남 내 한국인의 거주는 상인들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일본군에 속했던 한국인 중 일부가 베트남에 잔류하면서 시작됐다. 김기태 교수에 따르면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 한국인이 하노이에 약 100명, 사이공(현 호찌민시)에 약 2000명 있었다고 한다. 한편 최상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65년경 남베트남에 상주하고 있던 한국인 동포는 164명이었다. 남베트남 거주 한국인이 1945년 2000명에서 1965년경 200명 이하로 줄어든 이유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1945년 사이공에 한국인이 2000명 있었다는 주장도 신뢰하기 어렵다. 윤대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46년에 한국인 124명이 베트남 하이퐁에서 일본을 거쳐 부산에 들어왔는데 당시 한국인 10여 명이 베트남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45년경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이 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전반 베트남전쟁 시기에 베트남에 거주한 한국 민간인은 연인원으로 5만명에 달했다. 한 시점에 베트남에 거주한 한국 민간인 기술자들은 1만명을 넘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나며 한국인들은 대부분 베트남을 떠났다.
1992년 수교 이후 베트남 거주 한국인 증가세는 베트남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 있다. 베트남 북부 지도자들은 1975년 통일된 후 남부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려 하지만 부분적 성공만을 거뒀다. 이로써 베트남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반에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게 된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80년대 초반에 부분적 경제 개혁 정책을 도입하여 경제성장의 성과를 일부 거뒀다. 그러나 베트남이 1980년대 중반에 다시 경제적 침체를 맞아 공산당과 정부는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전면적 개혁인 ‘도이머이’를 선포하게 된다. 이 ‘도이머이’ 정책은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집행되기 시작했다. 베트남의 대외경제 관계는 1990년대 들어, 특히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가 베트남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해제한 1994년 이후에 급속히 확대된다. 이후 외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투자를 확대해 간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블루오션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이주하거나 베트남에 투자한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파견되면서 오늘날 베트남 내 한인 사회를 구성한다.
채 교수는 한국과 베트남이 1992년 12월 수교하기 이전에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를 약 50명으로 파악했다. 이 수가 1996년 말 호찌민시 인근에 5000여 명, 하노이 인근에 5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는 1997년 후반 이래 한국의 ‘IMF 사태’ 때에도 베트남 내 한국인 거주자가 줄지 않았다는 것도 밝혔다.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소규모 투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 수는 2000년대 초에 약 1만명 또는 1만5000명, 2010년대 초에 약 10만명으로 증가했고 2019년에 20만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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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홍 교수 저서 <베트남 한인의 베트남 정착과 초국적 삶의 정치]

 
베트남 한인 사회의 구성
 
채 교수가 한인 사회 구성에 있어 호찌민시와 하노이를 비교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호찌민시는 베트남이 1975년 통일되기 이전에 사이공이었다. 한국은 남베트남과 국교를 맺고 있었고 북베트남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베트남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이 베트남 파병이 남부, 특히 호찌민시 한인 사회의 ‘원로’ 그룹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통일 이전 남베트남 사회와 연관이 있던 한국인들이 개혁‧개방 시기에 다시 베트남을 찾아 사업을 시작하며 한인 사회의 ‘원로’ 그룹을 구성했다. 이후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한국 대기업의 지사와 상사의 주재원을 비롯한 한국인 수가 늘게 됐다. 이들은 ‘원로’ 그룹과 구분되는 부류, 즉 제2세대에 속한다. 이렇게 남베트남의 한인 사회는 상이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닌 부류들로 구성됐다. 이에 비해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한인 사회는 개혁·개방 이후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며 이주한 한국인들로 주로 구성됐다. 개혁·개방 이후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한국인들 가운데도 대기업 지사 및 상사의 주재원과 중소 규모의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주 또는 여기에서 일하는 공장 매니저들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달랐다. 베트남 경제가 발전하지 않아 경제적 차이에 따른 생활양식의 차이를 보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 이들 간에 구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채 교수에 따르면 이들 간 사회경제적 분화는 1995년경부터 시작된다. 대기업 직원이나 재외공관 주재원들은 기업 또는 소속 기관의 지원으로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었으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공장 매니저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 밖에도 거주 형태와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는 등 사회경제적 분화가 가시화됐다. 1997년 맞은 한국의 ‘IMF 사태’가 베트남 내 중소 투자기업에 충격을 주었으나 대기업에는 큰 충격을 주지 않았는데, 이것도 한인 사회 내에 대기업 주재원과 여타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 간 구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IMF 사태’ 이후 2000년대 초부터 한국인 소규모 투자자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하여 제3세대 한인 사회의 구성원이 됐다. 이와 더불어 2001년 베트남과 미국 간 양자무역협정(BTA) 발효 후 베트남 전국에 한국의 투자가 늘었고 2007년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시점을 전후로 하노이와 북부 지역에 삼성, LG 등 한국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져 한인 사회의 구성을 변화시켰다.
 
베트남 한인 사회의 정치와 향후 과제
 
채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한인회 구성의 역사는 지역별 차이를 나타내고 이에 따라 다른 내부 정치를 보여 준다. 남부 호찌민시에서는 초기에 상대적으로 윤택하지 않은 자영업자와 중소 규모 기업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회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대기업 직원이나 공관원으로 구성된 주재원들은 자신들과 ‘한인회 사람들’을 구별 지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호찌민시 한인 사회에서 ‘구별 짓기’는 한인회 내부의 갈등을 낳았다. 호찌민시 한인회는 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다. 2020년이 돼서야 이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하노이 한인회는 부유한 기업인이나 주재원이 주축을 이루고 자영업자도 포함되어 만들어지고 운영되기에 이러한 ‘구별 짓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호찌민시 ‘원로’ 그룹을 구성한 인사들처럼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 전쟁 시기에 베트남과 연관을 맺은 한국인이 통일 이후, 특히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에 하노이로 이주하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트남 개방 초기에 하노이에 거주하던 한국인 다수는 한국 상사의 주재원들이었다.
채 교수는 이러한 차이가 남부와 북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성격상 차이에 기인한 점도 있다고 한다. 남부에는 의류, 봉제 등 중소기업이 다수 진출하여 이에 종사하는 공장 매니저들이 다수 이주했고, 여기에 자영업자들이 초기부터 사업을 시작한 반면 북부에는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주재원들이 다수 이주했다. 이들을 계층적으로 구분하는 대표적인 기준은 거주지와 자녀의 학교였다. 대기업 주재원들은 회사의 지원으로 월세 2000~3000달러짜리 아파트에 살고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내는 반면 공장 매니저나 자영업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하노이 거주 한인은 하노이 한인 사회가 품위와 가치를 유지하나 호찌민시 거주 한인 사회는 주재원 말고도 ‘여러 부류’의 집합이어서 그러하지 못하다고 폄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하노이 한인 사회도 ‘IMF 사태’ 충격이 어느 정도 해소된 2003년경부터 개인사업자나 현지 구직자(흔히 ‘현채’라고 함)가 다수 유입되면서 변하였다. 이에 더하여 2007년과 2013년에 북부 박닌과 타이응우옌에 삼성 휴대폰 공장이 들어서며 하노이 한인 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다. 이로써 ‘품위를 유지하고 사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양극화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구분 기준은 고급 아파트 월세 지불 능력과 자녀를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느냐 여부다. 베트남 한인 사회에서 ‘품위 있는’ 한인들은 ‘품위 없는’ 이들을 무시한다.

채 교수는 이러한 한인 사회 내 구별 짓기 인식이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인의 우월의식으로 전개된다는 점도 지적한다. 설사 베트남 내 한인 사회의 내부에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여도 한국인들은 베트남인들을 대할 때 민족적 우위에 대한 확신하에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이에 대해 베트남인들은 한국인들이 무례하고 강압적인 국민성을 갖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런 편향적 시각이 상대 국민과 문화에 대해 상호 ‘낙인찍기’로 이어지면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한 경향일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인들 사이에, 그리고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경향도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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