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위안부. 강제노동, 韓日이 대립해야만 하는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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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입력 2023-12-1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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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요시히로 교수] 
 
 


지난달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한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송의 항소심 판결이었다. 서울고법은 피고인 일본 정부에 대해 피해자 1인당 2억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정부는 주권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의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국제법상 ‘국가면제(주권면제)’라는 원칙을 이유로 애초부터 소송을 인정하지 않고 참여하지도 않아 상고 또한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달 9일 이 판결이 원고 승소 형태로 확정됐다.
이번 재판은 원래 2016년에 제기된 것이었다. 2021년 1심 판결에서는 “국제 관습법과 이에 관한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주권적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하여 ‘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해 원고 측 소를 물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현행 국제 관습법상 일본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는 게 타당하다”며 “한반도에서 원고들을 위안부로 동원한 불법행위가 인정되므로 합당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지적하여 ‘주권면제’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판결이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바로 윤덕민 주일 한국 대사를 초치해 “극히 유감이며 일본 정부로서 본 판결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외무대신 또한 “국제법과 한·일 양국 간 합의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으로 극히 유감스럽고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일본으로서는 한국에 대해 국가로서 스스로의 책임으로 즉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다시금 강하게 요구한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2019년 한·일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빠졌지만 올해 3월 한국 정부의 사실상 ‘양보’로 관계가 개선됐다. 당연하다는 듯 한·일 양국 여론은 관계 개선을 환영했다. 한국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양보’에 대해 '빈손 외교' '굴욕 외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을 찬양하는 듯한 보도가 잇따르면서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필자도 한·일 관계에서 대화의 기회가 생긴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원래 2019년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계기였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문제의 발단이 된 것도 사법 판단이었다. 2018년 식민지 지배하의 강제노동 문제, 이른바 ‘징용공’ 문제를 놓고 피고인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그것이다. 이에 재판 당사자도 아닌 일본 정부가 판결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며 역시 당사자가 아닌 한국 정부에 대응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일본 정부 측 반응은 그때와 같다.
한국 정부로서는 삼권분립을 침범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당시 문재인 정부는 2012년 유사한 판단을 내린 사법부에 개입한 것이 '사법 농단'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박근혜 정부 탄핵의 결과로 탄생했기에 사법부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 결과 대일 외교로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당시 문재인 정부는 '반일 정권'으로 이해된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그렇지만 사법부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는 없다. 아니,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도 그렇듯, 그것이 입헌주의 민주국가의 룰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그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진보 정권은 ‘반일’이며, 그 밑에서 정치적으로 배려한 사법부가 내린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인식의 틀이 받아들여졌고, 일본 사회에서는 그것이 이미 상식인 것처럼 공유되고 있다. 그렇기에 2022년 윤석열 보수 정권이 탄생했을 당시 일본 여론은 별다른 근거 없이 한·일 관계 개선을 기대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식민지 강제노동 문제를 둘러싼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국 재단이 떠맡겠다는 ‘제3자 변제’라는 해결책을 내걸며 일본 정부와 여론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이번 사법 판단은 일본 여론을 당황하게 만든 것 같다. 현재 보수 정권인 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사법 판단이 내려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판결을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정부 방침에 따라 국제법이나 2015년 한·일 외무장관 합의에 반하는 판결이라는 시각이다. 다만 2019년과 2021년 때처럼 비판이 고조되는 상황은 아니고 적어도 일반 여론은 상당히 조용하다.

한편 이번 사법 판단은 한국 사회에서도 의외의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고 측 지지자들도 승소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고법은 특히 보수적 성향이 강해 인권보다 한·일 관계를 우선시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식민지 지배하의 강제노동과 관련한 2018년 판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인권을 존중한 이번 판결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아직 주류라고 할 수 없는 판결일지 모르나 기존 가치 판단에 일석을 던지는 사법 판단이 이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피해자 편에 선 이러한 판결이 나온 데 대해 국가 논리만 앞세우고 중대한 인권 침해에 면죄부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원고 측 대리인인 이상희 변호사는 “국제사법 흐름은 분명히 인권 중시로 가고 있으며 주권면제 법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관한 다양한 논의와 판례, 입법이 형성돼왔다”며 최근 세계 각국에서 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도 많이 나오고 있음을 지적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가 역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의 부작위를 지적한 것, 2012년과 2018년에 강제노동 문제를 놓고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판단이 내려진 것, 그리고 이번과 같은 ‘위안부’ 판결이 내려진 것 모두 피해자 구제 논리를 중요시하는 국제사법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 각지에서 잇따르고 있는 비슷한 사법 판단이 서로 영향을 미쳐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본 사회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듯이 한국 사법부가 진보 정권 눈치를 살피면서 ‘반일’ 판결을 내리고, 반대로 보수 정권하에서는 그런 판결을 저지함으로써 한 널리일 관계가 개선되고 유지된다는 이해가 얼마나 치졸한지 알 수 있다. 애초 2011년 헌재의 결정은 이명박 정권하였고 이번 판결도 보수정권하의 일이다. 게다가 강제노동 문제에 대해 과거 노무현 정권은 '이미 해결됐다'고 하는 일본 정부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로 한·일 관계가 좌우된다는 일면적이고 단순한 발상 자체가 왜곡된 인식의 틀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배하의 피해 문제나 피해자 인권을 이야기하면 '한국 측 대변자'로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 식민지 피해 문제를 놓고 한·일 관계가 삐걱거리자 '한국은 무엇을 요구하느냐'고 묻는 일본 여론도 많다. 식민지를 둘러싼 문제는 과연 한·일 간 문제, 즉 한·일이라는 국가 간에 대립해야만 하는 문제인가? 필자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의문이기도 하다.
필자가 지금 살고 있는 후쿠오카에는 오랜 세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온 시민사회가 있다. 거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하나후사 도시오(花房俊雄)·하나후사 에미코(花房恵美子) 부부가 재작년 <관부재판(関釜裁判)>이라는 책을 냈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関)와 부산(釜山), 즉 '관부(関釜)'를 오가면서 사법 투쟁을 해온 '소송과 한국의 원고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한 28년의 기록'(부제)을 담은 책이다.
세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식민지 피해 문제를 국가 간 문제로 엮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힘없는 풀뿌리 시민운동으로서 여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민족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감정론을 부추기는 수법을 일부 취해온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 피해자들과 함께해온 운동의 상당수는 인권 구제를 위한 활동이었다. 거기에는 한·일 갈등 이전에 한·일 시민의 연대가 있었다.
한·일 관계 발전을 이야기할 때 자주 지적되는 것이 한·일 간에는 공통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각을 세울 때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특히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는 한·일 간 신뢰와 협력 관계 구축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는 결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협동해야 할 과제는 그 외에도 많다고 생각한다. 식민지하에서 일어난 인권 문제, 피해자 구제, 그리고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여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일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번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해 나가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정부는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를 존중한다고 했다. 이것은 1965년 국교 정상화 때 '모두 이미 해결되었다'며 '불가역적 해결'을 했다고 하는 일본 정부 주장을 결과적으로 보강하게 된 합의다. 그렇다면 피해자 구제 문제는 이제 한·일 양국 정부가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일이 대립하는 문제에서 한·일이 함께 대처하는 인권 문제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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