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정치 이단아의 극약처방 아르헨티나 경제 살려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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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3-11-2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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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들에 인사하는 밀레이 아르헨 대통령  당선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이터연합뉴스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 투표일인 19일현지시간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투표소를 찾아 투표하고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밀레이 당선인은 이날 투표에서 개표율 9181 기준 5586를 득표해 4413의 표를 얻은 집권당의 세르히오 마사 후보를 따돌렸다 20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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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밀레이 아르헨 대통령 당선인
르헨티나 대선 결선 투표일인 19일(현지시간)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투표소를 찾아 투표한 뒤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주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극우 성향인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53)가 좌파 집권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선거 결과를 두고 주요 외신들은 아르헨티나의 극심한 경제난이 '무정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혜성처럼 나타난 정치 이단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집권 좌파와 우파 야당까지 기성정치인의 무능과 부패에 지친 유권자들은 부스스한 장발에 가죽 재킷을 입고 거침없는 입담에 기행을 마다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후보에게 열광했다. 그만큼 나라 경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경제학자 출신 방송인으로 불과 2년 전 정치에 입문한 밀레이 당선인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성 정치인을 모두 싸잡아 비판하며 표를 결집했다. 난파 위기에 처한 경제를 구하기 위해 중앙은행 폐쇄, 미국 달러화를 법정화폐로 채택, 정부 부처 대폭 축소와 공공보조금 삭감 등 급진적 조치에 의한 '새판 짜기'를 주장하고 있다. 선거 유세 중 집권 세력의 불필요한 정부 보조금과 복지 혜택을 쳐내야 한다며 전기톱을 휘두르는 퍼포먼스는 큰 화제가 됐다. 낙선한 좌파 집권당 후보 마사 경제장관은 여당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감세 정책과 보조금 지급 확대로 승리를 노렸지만 경제 파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거센 정권 심판론에 압도당했다. 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사에 깊이 뿌리내린 페론주의(Peronism·후안 도밍고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영부인 에바  페론과 펼쳤던 대중영합인 정책과 이념)의 한 분파다.

과거 세계적인 부국이던 아르헨티나는 오늘날 '경제위기'라는 꼬리표를  항상 달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서 탈락한 국가로 제일 먼저 거론되기도 한다.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몰락에 대해 국민을 과도한 무상복지로 중독시킨 '페론주의' 좌파 포퓰리즘에서 찾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페로니스트와 반대 우파 간 극심한 대결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정책은 끝없이 이어지는 대결과 정치 불안으로 인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표류했다.   

밀레이 당선인은 1983년 아르헨티나 민주화 이후 사상 두 번째 비(非)페로니스트 대통령으로 다음 달 10일 취임한다. 2015년부터 4년간 집권했던 기업가 출신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중도 우파로 분류된다. 그는 재임 기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친분을 과시하며 정부의 과도한 지출을 줄이고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면서 디폴트 국가경제 프레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국제 금리 상승 여파로 아르헨티나 부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확대되고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 페론주의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마크리 정부의 긴축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밀레이 당선인은 '급진적인 변화'를 통해 19세기에 경제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러나 현재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암울하다. 만약 그가 공언한 일련의 경제 회생을 위한 극약 처방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페론주의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100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 부자 국가였다. '팜파스'로 불리는 비옥한 대평원으로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와 근대 농업을 수출 산업으로 발전시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60여 년간 거의 30차례나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가 겪은 경제적 혼란이 얼마나 심각한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매년 재정 적자를 메꾸기 위해 중앙은행이 신규 통화를 발행하거나 외국에서 자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가치 폭락으로 휴지처럼 변한 페소화는 이미 법정통화로서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다. 30여 년 전인 1992년 화폐 개혁을 단행해 1달러-1페소 페그제를 도입하자 초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혔다. 그러나 1999년 경쟁국인 브라질이 헤알화 가치를 하락시키자 달러 강세가 이어지며 수출이 급감하고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경제는 다시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마침내 2001년 모라토리엄 선언에 이어 2002년 달러화 페그제를 페지했다. 밀레이 당선자는 과거와 같은 달러 페그제가 아니고 페소화를 아예 다 없애버리고 미국 달러를 법정통화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달러화 채택'  현실화 가능성 낮아 

외신들은 ‘달러화 채택 공약’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회의적인 시각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이미 월급 등 소득이 생기는 대로 생필품을 사거나 암시장에서 달러 현금을 모으는 것이 일상이다. 페소화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는 상황에서 현재 아르헨티나는 이를 대체할 만큼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블룸버그통신은 밀레이 당선인이 공약한 대로 페소화가 달러화로 전환되면 또 다른 초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자국 화폐를 버리고 미국 달러화를 도입한다는 것은 통화정책을 미국에 의존하게 되고 미국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IMF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경제는 올해 2.5% 역성장이 예상된다. 중앙은행 금리는 10월 현재 133%다. 국민 10명 중 4명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범죄율도 치솟고 있다. 전문가들은 수출과 투자 확대, 생산성 증대 등 거시경제의 근본적인 안정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달러화 법정통화 채택을 비롯한 아르헨티나 경제의 대수술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병인 환자를 수술대 올리려면 우선적으로 환자를 안정화시키는 조치가 필수인 것처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이웃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중남미 국가들은 원자재나 농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불안한 경제 때문에 극단적 좌파·우파 정치 실험을 반복해왔다. 국제사회 관심이 높았던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친미·반중 성향인 비주류 이단아가 집권하게 됨에 따라 향후 중남미 블록의 대외 노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아르헨티나 좌파 정권은 아르헨티나 기업이 중국산 제품을 수입할 때 위안화로 결제하게 하는 등 대중 경제협력 확대에 적극 공을 들여왔지만 밀레이 당선인은 중국과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까지 공언하고 있다.   

2015년 집권했지만 경제난 극복에 한계를 드러낸 마크리 전 대통령은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에서 밀레이 당선인을 적극 지지했다. 현지 보수 진영에서는 2000년대 초반 중남미를 휩쓸었던 '핑크 타이드(Pink Tide)'가 마크리 전 대통령 당선 이후 한풀 꺾였던 것처럼 밀레이 당선인이 제2의 핑크 타이드에 제동을 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마크리 전 대통령의 우파 세력이 2019년 정권을 페로니스트에게 다시 내주었듯이 향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 지형은 너무 변화무쌍하고 예단하기 어렵다. 

'핑크 타이드' 제동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  중남미 극우 독재정권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이후 1990년대 말부터 2014년까지 남미 12개국 중 파라과이와 콜롬비아를 제외한 10개국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권이 집권했다. 소위 1차 핑크 타이드의 중심 인물은 우고 차베스(1954~2013)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차베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와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들며 주변 국가들에 대해 반미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베네수엘라 수출액에서 80%를 차지하는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머니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급진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면서 4연임에 성공했다.

당시 남미의 좌파정권 대유행을 세계 원자재 가격 급등과 연결시키는 학자들이 많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브라질의 철광석, 볼리비아의 주석, 칠레의 구리 등 남미대륙의 풍부한 지하자원은 중국 경제의 급성장으로 수요가 급등했다. 퍼주기 정책으로 집권 장기화를 꾀하던 차베스가 사망한 이후 베네수엘라는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로 경제는 극단적으로 피폐해지고 부정선거 논란과 야당 탄압으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쯤부터는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재정 파탄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지자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등에 우파 정권이 속속 들어섰다. 그러나 2018년 멕시코에서 출범하기 시작한 좌파 정권은 2019년(아르헨티나), 2020년(볼리비아), 2021년(페루, 온두라스 ,칠레), 2022년(브라질, 콜롬비아), 2023년(과테말라)에도 이어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 국면에서 중산층 소득이 감소하고 실업자와 취약계층이 늘어나며 민심이 다시 좌향좌를 선택한 것이다. 특히 미국의 든든한 우방이었던 콜롬비아에서는 극심한 경제난으로 지난해 역대 처음으로 좌파 정권이 탄생하기도 했다. 

지난해 브라질에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현재 중남미 좌파의 상징적 인물이다. 과거 8년 집권 기간 부채에 허덕이던 브라질 경제를 살린 인물로 2010년 퇴임 당시에도 높은 인기로 구가했다. 2018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으나 2021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 확정으로 대선에 다시 출마해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렸던 전임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1.8%포인트 차이로 힘겹게 이겼다. 브라질은 과거 중국의 수요 증가로 안정적 재정을 확보했지만 현재 브라질 경제 상황은 급박하다. 정치적·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가운데 노동력 고령화, 공공부채 등 풀어야 할 숙제들이 너무 많아 룰라 대통령이 과거와 같은 높은 인기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미·중 간 패권경쟁이 격화하면서 중남미 대다수 국가들은 비동맹 외교 노선으로 위험 관리에 나서고 있다. 지난 5월 룰라 대통령은 중국에 대만해협 평화와 안정을 촉구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했던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과 함께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장비 지원 요구를 거절했다. 지난 20여 년간 핑크 타이드의 유행과 퇴조를 모두 경험했던 중남미 지도자들은 과도한 복지정책이 선거의 필승 공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분명해 보이는 것은 중남미 국가들이 과거와 같이 무조건 이념적 깃발 아래 똘똘 뭉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좌우를 떠나 중남미 국가 지도자들은 과거처럼 이념에 몰입되기보다는 원자재 대체산업 육성 등 실리적 접근을 통해야 국가 경제 파탄을 면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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