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칼럼] 포퓰리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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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입력 2023-11-24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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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포퓰리즘은 민주주의가 타락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우정치(衆愚政治)를 민주주의가 타락한 형태라고 말했는데, 중우정치의 현대적 형태가 포퓰리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 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며, 근본 가치조차도 외면하는 포퓰리즘과 달리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인류 역사를 통해 확인된 근본 가치와 그 헌법적 표현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다수결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현대 민주주의가 근본 가치의 존중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된 것은 나치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독일 국민 다수의 지지로 나치가 집권한 이후 국가권력의 독재화, 유대인 학살,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겪으면서 다수의 오류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요청되었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근본 가치는 다수결에 의해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포퓰리즘의 원조에 해당하는 나치는 국민들에 대한 선전⋅선동으로 대중조작을 일상화했고,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쓰고 집권한 이후에는 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이와 유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현재적 다수가 아닌 역사적 다수의 판단을 우선하는 것이 곧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하여 다수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가 여전히 민주주의의 위험 요소로 지목되고 있는 것은 남미 일부 국가뿐만 아니라 서구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포퓰리즘의 확산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남미 국가들에서 성행했던 포퓰리즘은 국가부도를 초래하기도 했고, 그 결과 국민 생활이 극단적으로 피폐해진 국가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베네수엘라를 들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남미의 산유국으로서 한때는 석유 생산에 기반하여 상당한 경제적 부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 경제는 국제 유가 폭락 이후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국유화와 민영화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까지 겹치면서 베네수엘라의 정치와 경제 모두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 고유가 시대에 포퓰리즘 정책을 앞세워 집권의 장기화를 꾀하던 차베스의 몰락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때 국내에서도 베네수엘라 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언론이나 정치인,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베네수엘라의 뒤를 따랐다면 현재 우리 모습은 어땠을까? 아마도 현재와 같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심지어 베네수엘라와 같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포퓰리즘에서 안전한가? 오랜 기간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 온 서구 선진국들조차 포퓰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국에서 브렉시트(Brexit·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가 발생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진국에서도 정치적 선동에 의해 자극된 국민들이 올바르지 못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것을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인 영국이 확인해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포퓰리즘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은 대선과 총선 등 중요 선거의 공약들이다. 승자독식인 선거제도에 따라 선거의 승리에 올인하는 정당들은 눈앞의 성과를 위해 미래의 자산을 헐값으로 처분하는 예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박근혜 전 대통령 선거공약에 의해 도입된 기초연금제도가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 개혁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선거철이 되면 기초연금 액수를 인상하겠다는 공약이 여야를 막론하고 난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도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그 결과 도덕적 해이로 인한 과잉 진료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의료보험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MRI 등 고가 의료장비를 많이 사용한 보험 가입자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오히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태를 신중하게 검토하지 못했던 정부 탓이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가 경쟁적으로 선심성 정책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군 복무 중인 병사들 월급을 대폭 인상한 것이다. 물론 국가 재정에 충분한 여력이 있다면 이를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체 국방 예산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 문제, 최근의 긴축 재정에서 이러한 경직성 예산의 증가가 야기하는 부담,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선거공약을 통해 도입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이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가 총력전을 선언하고 있다. 아직은 공식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하지 않았지만 조만간에 여야가 선거 공약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과연 어떤 선심성 공약들이 새로 등장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정치는 또 얼마나 포퓰리즘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선거의 승리가 더 중요하니까 잠시의 후퇴는 불가피하다는 변명은 옳지 않다.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하므로 선심성 공약이라도 이를 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결국 포퓰리즘 공약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선거를 치를 때마다 국민에게 당장의 혜택을 제시하면서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정책들은 어떤 명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이와 관련해 국민들의 책임도 부정될 수 없다. 국민이 더 깨어 있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더 확실하게 갖는다면 그런 선심성 공약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정치 ‘지도자’라면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지가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던 케네디 미국 대통령처럼- 국민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위기를 위기라고 말하면서 이를 국민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정치적 리더십이 아쉬운 지금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비상임위원 △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 △전 국회 개헌특위·정개특위 등 자문위원 △전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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