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 정신] (10) 세계기록유산 한글 창제 주역 신숙주…조선의 기틀 다진 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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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조선대학교 미래융합대 교수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3-11-2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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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성종 30년 동안 조선의 기틀 다진 탁월한 정치가

  • 고려사절요 등 많은 역사서 쓰고 영의정 두 번 지내

 
신숙주 영정
신숙주 영정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마을은 ‘한글마을’로도 불린다.
한글 창제 주역이자 조선 전기 명신(名臣)인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태어난 마을이기 때문이다.
금안마을은 ‘호남 3대 명촌(名村)’으로 이름났다. 다른 두 곳은 영암 구림마을과 정읍 태인이다. 금안마을은 금성산과 영산강을 두른 호남평야의 중심이자 인물이 많이 났다. 마을 사람들은 우애 좋고 평화롭게 살았다.
이곳에는 네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 나주 정씨, 서흥 김씨, 풍산 홍씨, 고령 신씨다. 나주 정씨 대표적인 인물은 정가신(1224~1298). 고려 후기 문신이다.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학문을 높이 사 금(金)으로 만든 안장, 금안(金鞍)과 백마를 내려주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금안마을이 됐다. 서흥 김씨 김총은 조선 전기 성리학자 김굉필의 숙부다. 금안마을 김씨들은 김총의 후손이다. 풍산 홍씨 홍수(洪樹)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자 화를 면하려고 이곳으로 피신했다.
보한재 신숙주는 고령 신씨다. 아버지 신장은 나주 정씨 정유의 딸을 만나 맹주, 중주, 숙주, 송주, 말주 5형제를 뒀다.
네 성바지가 한 마을에서 내남없이 지내고 ‘대동계’를 운영하며 향약의 미덕을 서로 나눴다. 대동계 모임 장소는 쌍계정이었다. 이곳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쌍계정에는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수령 400년이 넘은 푸조나무가 쌍계정을 감싸 안고 있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탁월한 정치가·문장가

신숙주는 사성강당에서 공부하며 자랐고 과거에 급제한 다음 조선 전기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겼다. 언어학자, 외교관, 군인, 시인, 정치인, 사상가로 활약하며 조선의 기틀을 닦았다.
신숙주는 대제학을 지낸 윤회의 문하에서 배웠다. 윤회는 하륜, 정도전과 함께 조선 건국 공신이다. 신숙주는 뒤에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해 정몽주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공부하던 시절 신숙주는 탐진강과 영산강 강물이 황해로 흐르는 것을 보고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깨달음을 시로 읊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의 큰 흐름이었다.
1439년(세종 21년)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해 전농시직장에 임명되었는데 아전이 임명장을 전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추궁하자 신숙주는 ‘아전이 사령장을 주었는데도 나가지 않았다’며 아전을 감싸고 대신 징계를 받았다. 파직되었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세종의 부름을 받았고 큰 신망을 얻는다.
 
한글창제비
한글학회가 세운 한글창제비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이 된 신숙주는 책을 좋아해 장서각에서 귀중한 서책들을 밤새도록 읽었다. 세종이 그의 학구열에 감탄하고 손수 어의를 하사했다.
이듬해 신숙주는 일본통신사 서장관으로 임명돼 외교 무대에 선다. 탁월한 문장과 능숙한 외교로 조선의 위상을 높였다. 이때 자신의 행적을 나중에 ‘해동제국기’에 싣는다. 그가 쓴 해동제국기는 조선 전기 일본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를 담은 가장 정확한 사료로 인정받았다.
일본에서 돌아온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업에 참여한다. 신숙주는 중국어와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에 능통해 조선의 음운 구조를 비교 분석했다. 요동으로 유배 온 중국 한림학사 황찬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과 언어에 관해 토론했다.
1446년 드디어 ‘백성을 위한 언어’ 한글이 반포됐다. 신숙주는 이후에도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사성통고’를 저술했다. ‘동국정운’을 편집하며 한글의 음운학 연구에 전념했다. 지금도 국어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가장 먼저 신숙주가 쓴 책부터 읽는다고 한다.
1450년 중국에서 예겸과 사마순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신숙주는 그들을 맞이하며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다. 사신들은 신숙주가 지은 시(詩)를 보고 “굴원이나 송옥과 같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굴원과 송옥은 중국 전국시대 유명한 시인이다.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희경루 지난 9월 새로 단장됐다
광주광역시 남구 광주공원에 있는 희경루. 새로 지어 지난 9월 준공됐다.

그가 쓴 ‘희경루기’···“동방 제일의 누각”

광주목(현 광주광역시)은 무진군으로 강등됐다가 1430년(세종 12년)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된다. 때마침 짓고 있던 누각이 완공되자 고을 어른들과 태수는 승격된 것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려고 누각 이름을 ‘희경루(喜慶樓)’라고 지었다. 신숙주는 ‘희경루’ 기록인 희경루기(記)를 썼다. 그가 쓴 글을 보자.
“··· 이에 재목을 모아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 하여 몇 달이 채 안 되어 준공을 하였다. 건물 칸 수는 남북이 다섯 칸이고 동서가 네 칸인데 넓고 밝으며 장엄하여 동방에서 으뜸가는 누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대숲이 내려다보이는데 누의 북쪽에 못을 파 연을 심고 따로 동쪽에 활터를 만들어 관덕(觀德)의 장소로 만들었다. ··· 동방 제일의 누각이다.”
광주광역시는 신숙주 글을 참고해 올해 9월 20일 157년 만에 희경루를 중건했다. 신숙주가 ‘동방 제일의 루(樓)’라고 말했듯 희경루는 아름다운 누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난공신으로 영의정까지···세조 “나의 위징”

신숙주는 춘추관 기주관에 임명돼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를 썼다. ‘고려사’와 함께 가장 실증적인 역사서로 손꼽힌다.
1452년 사은사 서장관에 임명돼 수양대군과 함께 10월에 명나라로 출발한다. 두 사람은 동갑이다. 이때 동행하면서 둘은 마음으로 가까워졌다. 이듬해 단종 1년에 수양대군은 왕위를 빼앗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단종을 보위하려던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지지한 ‘정난공신’이 된다. 세조 집권 2년인 1456년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세종과 문종에서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 유신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이 주도한 단종 복위 계획은 탄로 나 사육신과 연루자들이 처단됐다. 단종을 불쌍히 여긴 사람들 눈에는 신숙주는 변절자였다. 그래서 ‘변절한 신숙주처럼 쉽게 맛이 변한다’는 뜻에서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1920년대 새로운 역사관에 따라 변절자가 아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신숙주가 어린 시절 읊었던 ‘바다는 산골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든 말과 소를 씻은 더러운 물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시(詩)처럼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제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후 신숙주는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도승지,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 우의정을 거쳐 최고 지위인 영의정까지 지낸다.
‘국조보감’을 펴낸 신숙주는 1457년 세조에게 ‘나의 위징(魏徵)’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위징은 중국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정치가다. 태종의 행실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며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태종은 자신에게 늘 극간을 하는 위징이 죽을 만큼 싫었다. 하지만 태종은 그가 있어서 자신의 치세가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말했다. “사람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위징이 죽었으니 나는 거울을 잃어버렸다.”
세조에게 신숙주는 당 태종 때 위징처럼 ‘사람의 거울’ 역할을 한 신하였다.
 
나주시 금안동 쌍계정
나주시 금안동 쌍계정


성종 때 다시 영의정 재임···역사책 줄줄이 펴내

세조 때 평안·황해 양도 도체찰사,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돼 야인이라고 불리던 여진족을 토벌했다. 1461년 여진 정벌을 내용으로 한 ‘북정록’을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두만의 봄강이 변방 산을 둘러 흐르는데
나그네의 돌아가는 꿈은
오색구름 사이에 있네.
중서들은 취한 뒤에
아마 다른 일이 없으리니
밝은 달 배꽃에 추위를 겁내지 않으리라.’
 
이 글에서 ‘중서’는 ‘관청 사람’이라는 뜻이다. 변방의 야인들을 평정하니 변방 관청 사람들이 할 일이 없을 정도로 평화를 얻게 됐다는 자신감이 드러난 시다.
세조에 이어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는 한명회 등과 원상에 임명되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다. 12세 어린 나이로 왕이 된 성종은 불안하자 신숙주 등 옛 공신들을 가까이에 두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신숙주의 묘
신숙주의 묘


신숙주는 끊임없이 역사서를 썼다. ‘세종실록’ ‘국조오례의’ ‘경국대전’을 저술해 성종 임금에게 올렸다.
1474년 58세 때 신숙주가 성종에게 지어 바친 ‘사직의 소(訴)’를 보자.
“나라 다스림은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근본을 일삼으면 백성이 부유해집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이 백성이 부유해지는 것만 못합니다.” 국가 경영의 모든 비책이 담긴 명문장으로 평가받는다. 죽기 전 성종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기도 하다. 그해 신숙주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8세. 시호는 문충. ‘보한재집’은 1487년(성종 18년) 편찬됐다.
1971년 10월 9일 한글학회는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신숙주 묘정에 ‘한글창제 사적비’를 세웠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됐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신숙주는 조선 전기 정치와 문화, 외교, 군사 분야까지 두루 나라를 위해 공헌한 명신(名臣)이다. 지금도 그의 위업은 기려지고 있다.
 
*참고서적 :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선생 주요 글모음’(고령신씨 문충공 보한재파 종중회, 2018), ‘신숙주 평전-사람의 길 큰 사람의 길’(박덕규, 2017), ‘해동제국기’(신용호 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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