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정신](11) 3대에 걸쳐 의병운동 김창균 가족…민족운동ㆍ독립운동 '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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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조선대학교 미래융합대 교수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3-11-2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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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와 두 아들, 손자와 며느리 5명이 건국훈장 애국장

  • 후손 찾지 못해 24년 만에 훈장 전수... 묘지만 남아

  • 나주시, 의병역사박물관 신축 중 2025년 완공 예정

김복현 가족사진 왼쪽 둘째가 김복현 맨 왼쪽은 아들 김재호 셋째가 손자 맨 오른쪽이 며느리 신정완
김복현 가족사진. 왼쪽 둘째가 김복현, 맨 왼쪽은 아들 김재호, 셋째가 손자, 맨 오른쪽이 며느리 신정완.


2019년 6월 7일 KBS가 보도한다.
“가족들이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후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보훈처에 등록된 이름과 부르던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라는데요. ··· 1919년 광주 3·1운동을 주도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평생을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한···.”
 
나주 김창균(옛 이름 김창곤) 가족에 관한 뉴스다.
김창균에게 1995년, 아들 김석현에게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지만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이 전달되지 못했다. 이후 2019년 전남대학교 의향정신세계화사업단의 노력으로 후손 김달호를 찾아내 이들의 훈장을 전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김창균과 아들 김석현·김복현(김철), 손자 김재호, 손자며느리 신정완에 이르는 3대(代) 총 5명이 건국훈장을 받는 일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의병항쟁을 했고, 아들과 손자는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나주와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민족운동·독립운동 명가(名家)’다. 하지만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김창균이 언제 태어났는지조차 모른다. 그가 주로 생활했던 나주향교와 연리청이 사라졌다. 기념물이라고는 그의 묘지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24일 나주시민회관에서 ‘한말 나주 의병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나주시가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학자 4명이 주제 발표를 하고 풀어야 할 과제를 언급했다.

한규무 광주대 교수는 독립운동 명문가인 ‘김창균 가문의 민족운동’을 발표하고 “이 분야 연구에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현실 앞에 학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자료 수집과 후속 연구가 기대된다.

나주시는 현재 ‘나주의병역사박물관’을 짓고 있다. 2025년 완공 예정이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주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널리 선양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창균 가문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을 살펴보자. 김창균은 살면서 ‘김창곤’으로 불렸지만 보훈부 공식기록에 ‘김창균’으로 적혀 있어 그에 따른다.
 
명성황후 시해·단발령 이후 의병 일으켜
 
김창균((?~1896)은 전남 나주 향리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제와 친일 정권이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을 시해하고 11월 15일 단발령을 공포하자 전국 유림을 중심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됐다. 이른바 화서학파(華西學派), 정재학파(定齋學派), 남당학파(南塘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를 중심으로 위정척사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곧바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전국적으로 거병한다. 광주에서는 기우만이, 장성에서는 기삼연이 1896년 의병을 일으킨다. 김창균도 그해 2월 나주에서 유생 이학상의 의병부대에 합류한다. 이어 나주 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 명과 함께 관사로 쳐들어가 참서관 안종수 등 치안책임자 3명을 처단했다. 그리고 박 시찰, 복 주사 등 간부 6명을 붙잡았다. 향교로 돌아온 김창균은 “참서관과 총순 무리들은 역적의 도당으로 모두 맞아 죽었다. 나주고을 의병이 처음만 있고 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의병부대를 제대로 꾸려 전면적으로 싸우자는 것이다. 친일 정권의 개화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음 날 향교 향리들 근무처인 연리청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부대 직제와 책임자를 정한다. 이학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향리 출신인 김창곤은 좌익장을 맡는다. 참모로 사인(士人) 나병두, 전 현감 손응을 임명했다. 중군장은 이승수, 우익장은 박근욱이 맡았다. 김창곤 큰아들인 석현도 안종수 처단에 참여해 나주 의병의 핵심이 된다.

그러나 나주의병은 미처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관군인 전주진위대에 의해 진압된다. 김창균은 1896년 5월 5일 보성에서 관군에게 붙잡혀 총살되고 아들 석현도 피살되어 순국한다. 당시 김창균이 55세, 아들 석현은 32세였다.
 
김복현의 묘
김복현의 묘

 
오방 최흥종 목사와 교류하며 광주만세운동 주도
 
김창균의 다섯째 아들 김복현(예명 김철·1890~1969)은 광주 지역 3·1운동에서 빠짐없이 언급된다. 3·1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계 민족운동가다. 그는 나주시 금성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 후에는 광주에서 활동한다.

1919년 2월 하순 서울 3·1운동 준비위원회 측이 김필수 목사에게 “광주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해 달라”고 하자 김 목사는 광주에 와서 오방 최흥종 목사와 이 문제를 논의한다. 최 목사는 김복현과 함께 상경해 담양 출신 유학생 국기열 주선으로 청량리 근처 산기슭에서 광주 출신 유학생 김범수·정광호·최정부를 만나 광주 만세 시위를 협의했다. 그 자리에서 김복현은 광주 만세 시위 책임자로 추대됐다. 김복현 발걸음이 바빠진다.

3월 1일 서울 만세 시위 상황을 지켜보고 독립선언문과 동포에게 고하는 격문, 독립가(獨立歌)를 가지고 광주에 온 김복현은 3월 6일 숭일학교 교사 김강과 이 문제를 상의한다. 이어 최병준·손흥진·김태열 등을 만나 자신이 보고 겪은 상황을 설명하고 광주에서도 만세 시위를 하자고 제안한다. 숭일학교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 독립가를 수천 장 인쇄했다. 마침내 1919년 3월 10일 광주시장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서 시민과 학생 1000여 명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다. 이어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참여해 다시 일경에 체포된다. 광복을 맞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고 건준이 해산되자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신민당 전라남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고 고문을 지냈다. 5·16군사정변 때 반대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르고 1969년 민주주의와 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묻은 채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복현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이승만 정부 시절이다. 김복현은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를 살릴 마음은 없고 정치에만 뜻이 있다며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서 기르던 개를 ‘승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유공자를 추서하고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만들자 “내가 일본군 앞잡이 하던 자에게 훈장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했느냐”고 역정을 내며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남은 가족들 생활은 비참했다. 김복현 부인은 평생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을 한탄하기보다 친일하던 인사들이 얼굴만 바꾸고 다시 나라를 좀먹는 것이 용인되는 사회를 한탄했다고 한다.
 
 
김창균 의병장의 묘
김창균 의병장의 묘


김재호 부인 신정완은 해공 신익희 외동딸
 

김복현의 장남인 김재호(1914~1976)도 아버지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전주 신흥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3년 2월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서 파견된 비밀공작원 정의은을 따라 중국으로 떠난다. 김재호는 상해에서 의열단 간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한 뒤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37년 7월 이후에는 산서성 일대에서 선무공작을 하고 1941년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에서 대원으로 활동한다. 일본군 배치 상황과 부대 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중국군사령부와 광복군 본부에 보내는 일을 했다. 김재호가 제공한 정보를 이용해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그의 곁에서 도와주던 여성 대위가 훗날 아내가 된 신정완이다. 그러던 중 김재호는 김구의 뜻에 따라 중경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이 된다. 초대 선전부장은 김규식이었고 선전위원은 조소앙·신익희·엄항섭·김성숙·유림·안우생 등 15명이었다. 김재호는 당시 27세 청년이었다. 1942년 10월에는 선전위원회 위원이면서 발행부 주임을 맡는다. 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전라도의원으로 선출돼 광복 때까지 의정활동을 했다. 임시정부 내무부 사회과장과 총무과장을 지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해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과 박정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독립운동가를 대표해 참여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신정완(1916~2001)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의 외동딸이다. 3·1운동 직후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공작원으로 파견돼 지하공작 첩보활동을 했다. 김재호와 결혼한 후 1943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의원으로 선출돼 부부가 함께 활동했다. 임시의정원 역사상 7번째 여성 의원이자 마지막 여성 의원이었다. 광복 후 귀국해 서울 한성화교학교와 숙명여고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남편 김재호와 사이에 두 아들을 뒀다. 신정완은 1981년 ‘해공 그리고 아버지’라는 책을 출간했다. 1968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 ‘김창균가의 민족운동’(한규무, 2023) ‘독립유공자공훈록’(보훈부), ‘나주의병사’(나주시, 2022),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홍영기, 2004) ‘전라도역사이야기’(정유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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