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 정신](6)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 쓴 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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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조선대 미래융합대 교수
입력 2023-10-2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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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에서 고향에 가다 풍랑 만나 표류... 중국 도착

  • 136일 동안 중국 8000리길 생생하게 적은 기행문

  • 동국통감 집필한 성리학자 임금 앞에서도 할 말 해

늘어지전망대에 세워진 표해록 지도비 사진백승현
늘어지전망대에 세워진 표해록 지도석. 최부가 이동한 경로를 새겨 놓았다. [사진=백승현]
 
천년 고도(古都) 나주의 한복판을 가로 지르며 영산강이 흐른다. 영산강이 350리 길의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곳이 동강과 몽탄이다. 물줄기가 동강면 뭍을 만나 한반도 지형을 만들었다.

나주시는 이를 소중히 여겨 ‘표해록 따라 걷는 곡강(曲江), 최부 길’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곳에 4층 높이 전망대를 세웠다. 앞 표지석에는 최부의 중국 표해 여정이 담겨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유연한 영산강의 자태, 신비로운 한반도 지형으로 눈맛이 시원하다. 그게 한반도라면 조선 시대 한양쯤 되는 곳이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다. 그곳에서 최부가 태어났고 가까운 성지마을에 묻혔다. 옛 이름은 ‘늘어지’다. ‘늘어지’는 강물이 하구에 다다라 물길이 ‘느려진다’는 뜻이란다.
 
제주에서 나주로 향하다 표류
 
최부는 1488년 초 제주도 조천항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1년 전 추쇄경차관(도망친 노비나 범죄자들을 색출해 되돌려 보내는 관원)으로 제주도에 부임했고 새해 벽두 아버지 최택(崔澤)의 부고를 받고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 나주로 가는 배의 돛을 올렸다. 호송원과 기록관, 키잡이, 뱃사공, 호송군까지 합쳐 43명이 동행했다. 그런데 배는 출항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거센 풍랑을 만나 노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졌다. 끝내 큰 바다로 흘러가 표류하게 된다. 난파 위험과 배고픔, 갈증이 그들을 괴롭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들 두려움에 떨며 통곡하고 울부짖었다.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최부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홑이불을 찢어 자기 몸을 여러 겹으로 감아 배 한가운데 가로목에 묶었다. 죽은 뒤라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최부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무사히 선산에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그사이 해적을 만나기도 했다. 글을 써서 소통하는데 두목이 눈을 부릅뜨며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최부의 머리카락을 끌어다 거꾸로 매달더니 작두를 들어 목을 향해 내리쳤다. 다행히 칼날은 스쳤지만 오른쪽 어깨에 큰 상처를 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사투는 이어졌다. 생지옥이었다.

배는 13일 동안 바다를 표류하다 중국 절강성 삼문현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다다랐다. 우여곡절 끝에 최부 일행은 중국 관원들에게 넘겨졌다. 관원들과 함께 북경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중국 대륙을 아래에서 위로, 서에서 동으로 횡단했다. 임해~염파~항주~소주~양주~회안~서주~제령~창주~천진~북경까지 8000리 길이었다.

중국 관원들에게 심문을 받고 이런저런 고초를 당하지만 조선 선비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언행을 신중하게 했다. 효(孝)와 충(忠)이라는 유교 정신을 중국 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는 사이 관원들은 점점 최부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존경하게 됐다. 그 덕분에 일행은 잘 지낼 수 있었다.

최부는 제주도를 출발할 때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일행들이 상복을 벗는 게 좋겠다고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북경에 도착해 중국 황제를 만났을 때도 상복을 입고 있었다. ‘군신의 예’보다 부자간 의리가 먼저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중국 고위 관리가 물었다. “그대 나라 국왕의 성과 이름이 무엇이오?” 최부가 대답했다. “효자는 차마 부모님 이름을 거론하지 못하오. 그래서 사람의 허물을 듣는 것을 부모의 이름 듣는 것처럼 하라고 했소. 하물며 신하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하게 남에게 말해서야 되겠소?” 중국 관리가 다시 재촉한다. “국경을 넘었으니 상관없소.” 그러자 최부는 버틴다. “조선의 신하된 자가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등지고, 행실을 다르게 하고, 말을 바꿔서야 되겠소?” 국왕 이름을 외국인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조선의 법을 끝까지 지켜 왕과 조선의 자존심을 지켰다.
최부가 제주에서 중국 대륙을 거쳐 한양으로 귀국한 이동경로
최부가 제주에서 중국 대륙을 거쳐 한양으로 귀국한 이동 경로.


살아 돌아와 중국 견문기 작성

최부 일행은 북경에 도착한 뒤 간단한 심문을 받고 풀려났다. 풍윤~영평~산해관~광령~요동을 거쳐 국경을 넘었다. 일행 43명은 136일 동안 중국 대륙을 걷고 또 걸어 7월쯤 의주를 지나 무사히 한양에 도착했다. 제주에서 배를 타고 가다 표류한 지 6개월 만이다.

성종은 그가 보고 겪은 일을 ‘견문 일기’로 기록해 바치라고 했다. 최부는 아버지를 여윈 상주(喪主)로 하루빨리 고향 나주로 가서 삼년상을 치르고 싶었다. 맘이 급한 최부는 어명을 받고 8일 동안 청파역에 틀어박혀 일기를 기록해 바쳤다. ‘표해록’이었다. 5만4000자에 이르는 3권짜리 기행문이다. 그가 중국 각지에서 그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모두 기록해 놓았기에 가능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까지도 모두 글로 남겼다.

중국 역참과 사적은 물론 산천과 풍토, 습속과 중국인 생활상을 세세하게 적었다. 지식인 최부는 이 책을 통해 자기 교양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기행문’으로 유명한 '표해록'을 우리는 지금 읽을 수 있게 됐다.
 
금남 최부가 쓴 표해록사진국립광주박물관
금남 최부가 쓴 표해록. 그의 외손인 유희춘이 처음 발간했다.[사진=국립광주박물관]

조선에 처음으로 수차(水車) 보급
 
소흥부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중국 관리가 조선의 역대 연혁과 제도와 풍속을 적어 보라고 요구한다. 그때 최부가 쓴 글은 “연혁과 도읍은 처음 단군이 당의 요임금과 나란히 즉위해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해 1000여 년이 지났다”로 시작한다. 조선의 통사를 담은 셈이다.

항주에 갔을 때 적은 글을 보자. “서호는 성 서쪽 2리에 있는데 남북의 길이와 동서의 직경이 10리다. 죽각이 광화원에 있는데 백낙천이 세운 것이다. 백낙천의 시 가운데 ‘밤에 죽각 사이에 잠든다’라는 구절은 바로 여기를 가리킨다”고 적었다. 중국에 관한 최부의 해박한 지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와 다른 중국을 의식하고 중국을 통해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는 상호 인식의 자세를 견지했다.

애민 정신도 빛난다. 1488년 3월 23일 중국 정해현을 지날 때 최부는 수차(水車)를 보게 된다. 중국 관원에게 요청했다. “수차에 관해 배우고 싶소. 우리나라에 논이 많고 자주 가뭄이 드니 수차 제도를 배워 백성들에게 가르쳐서 농사일에 보탬이 된다면 좋겠소.” 명나라 관원은 흔쾌히 기계의 구조와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줬다. 조선에는 수차라는 것이 없었다.

최부는 중국에서 수차에 관한 공부를 한 덕분에 조선에 돌아왔을 때 1496년(연산군 2년) 충청도에 가뭄이 들자 현지에 파견돼 수차를 만들어 유용하게 활용한다. 물론 전국으로 퍼졌다.
 
최부의 탄생지 비석사진백승현
최부 탄생지인 나주시 동강면 성지촌에 세워진 유허비. [사진=백승현]


동국통감 집필한 사학자
 
550여 년 전 중국 모습을 담은 기행문이 생생하게 현대에 소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최부의 문채(文彩)와 실용 정신은 빛난다. 그는 자주적 사관으로 역사서를 집필한 사학자이고, 대의명분에 충실한 성리학자였다. 임금에게도 굽히지 않았던 서슬 퍼런 신진 사림이었다.

알성시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해 교서관 저작, 박사를 거쳐 군자감 주부, 성균관 전적으로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33세 때인 1486년 사헌부 감찰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이 됐고 김종직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펴냈다. 2년 후 1488년 '표해록'을 집필한 다음에는 정5품 수찬, 종5품 홍문관 부교리, 종5품 부사직 관원을 지냈다.

1496년 사간으로 자리를 옮겨 연산군의 실정을 극간하는 상소문을 기초하고 공경대신을 비판했다. 얼마나 뼈아픈 상소를 했는지 연산군은 최부를 기피할 정도였다.

당시 상소문이다. “학문을 게을리하고 오락을 즐기며, 종친과 외척과 후궁 그리고 훈구의 노복이 궁궐에서 활개 치고 오가며, 환관이 제멋대로 세력을 부리고 있으며, 패륜을 저지르고 공물을 훔치고 양민을 노비로 삼거나 뇌물을 주고받았던 죄인들마저 마구잡이 사면하여 강상(綱常)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임금 눈에 불똥이 튀었다.

중국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를 파견할 때 최부는 질정관으로 임명됐다. 연산군은 돌연 “사간 직함을 내놓고 가라”고 명령했다.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1498년(연산군 4년) 45세 때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됐다가 1504년(연산군 10년) 51세 때 갑자사화를 만나 참형을 당한다. 표해록이 빌미가 됐다.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이 더 시급한데 임금의 명에 따라 표해록을 펴낸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부의 영정 사진이 없다. 후손들이 후환을 우려해 없앴거나 그의 업적을 소홀히 여겼는지 모른다. ‘연산군 일기’ 가운데 졸기(卒記)가 있다. 여기에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했다. 경서와 역사에 능통해 문사(文詞)가 풍부했다. 간관(諫官)이 돼 아는 것을 피하지 않고 낱낱이 말했다”고 돼 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절의(節義)와 도덕주의를 유감없이 펼친 '동국통감'의 수정 보완 작업은 최부의 위대한 사관(史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이 명분과 의리의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래 의식을 담아냈다. 최부는 55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정치와 국가관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선비 중의 선비였다.

*참고서적 : 사림열전(이종범, 아침이슬, 2006), 표해록(최부 지음,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19), 최부 선생 표해록을 통한 중국 교류협력 방안 모색(한중문화교류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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