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 칼럼] 지금 우리에게 '북방'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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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사)남북물류포럼 대표
입력 2023-06-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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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북물류포럼 대표]

지금부터 15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다. 노무현 정권 말기였던 2007년 7월 어느 민간지원단체 주선으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같이 갔던 사람 중에는 D조선해양 N사장도 있었다. 그와 함께 ‘청년영웅도로’를 거쳐 남포 인근 ‘영남배수리공장’을 찾았다. 공장 전체를 둘러본 다음 북한 해운성 관계자들과 회담을 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 조선 경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N사장은 배수리 공장을 개조해 선박 일부를 짓고 이를 남한으로 가져와 조립하여 선박을 완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외국 선주가 언제든지 평양으로 와 조선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둘째, 자재와 인력을 휴전선을 통해 24시간 육로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남북한 당국자 차원에서 상응한 조치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사인이었으나 민간기업 대표로서는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순간 필자는 북한 해운성 관계자 눈빛을 보았다. 수락 여부가 자신의 권한 범위를 크게 넘어선 것이었지만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강한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후 정권 교체와 함께 남북 관계 침체로 없었던 일이 되었지만 그때 필자는 그 사업이 우리가 북방 유라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강력한 연결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북방길이 열리고 이어지면서 남북한은 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면한 많은 경제적 어려움들이 북방사업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매일 수많은 물자와 수만 명이 평양을 거쳐 유라시아에 체류하는 상황이 된다면 남북한은 그야말로 ‘사실상 통일’의 길에 접어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언어·체질·문화적으로 북방과 연결돼 있다. 원래부터 고립된 민족이 아니다. 먼 옛날부터 주변 지역의 문화 요소들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며 살아왔다. 연결하며 살았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지리적 위상은 바로 그 연결의 통로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연결되고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정학적으로는 취약한 지역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개방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리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말과 같이 주어진 지정학적 여건을 어떻게 타개하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는 그만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지정학 분석가인 로버트 캐플런(Robert David Kaplan)은 '지리의 복수(The Revenge of Geography“에서 세계의 변화와 미래를 지리학적인 시각에서 예측하고 분석했다. 지리적 요인이 세계의 정치·경제·군사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했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수십 년 안에 철도와 도로, 파이프라인이 유라시아의 모든 곳을 연결해 유기적으로 통합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우리에게 북방은 있는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완전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야 할 북방의 길을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린 것 같다. 이제는 ‘북방’이라는 말조차 들리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 때에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한 적도 있었다. 유라시아를 지향하고, 물류·교통·에너지·인프라 구축을 통해 북방의 거대한 단일시장 형성을 꿈꾸기도 했다. 유라시아 지역을 성장엔진으로 삼아 한반도를 경제통상과 문화교류의 장으로 만들어 평화를 다지고, 중국의 일대일로와 러시아를 잇는 ‘초국경 경제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한·미, 한·중, 한·러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신경제구상'을 통해 우리가 동북아 중심국가로 자리매김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평화의 축’으로서 동북아 평화협력 플랫폼을 구축하고, 동북아를 넘어 남방·북방 지역을 ‘번영의 축’으로 삼으려고 했다. 한·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간에 FTA를 추진하고, 중국 ‘일대일로’에도 참여해 동북아 주요국 간 다자협력을 제도화하려고 했다. 제3회 동방경제포럼(2017년 9월)에서는 북방 국가들과 경제협력 확대, 조선, 북극항로, 가스, 철도, 전력, 일자리, 농업, 수산 등 9개의 다리(9-Bridge) 전략을 새로운 협력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출범(2017년 8월)시킨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에는 '평화와 번영의 북방경제공동체’라는 비전을 통해 우리 경제의 미래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남북한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남·북·러 간 삼각 협력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처음으로 만든 '북방경제협력위원회'는 지금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윤석열 정부는 이를 살려 나가지 않았다. '부실하게 운영되는 식물 위원회'로 낙인찍어 존속 기한을 연장하지 않은 채 가장 먼저 폐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변화된 국제정치와 안보 환경에 편승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북방을 외면하고 안보 위주의 편중된 국가 관계를 가져가는 것만이 과연 능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미국이 중국을 제재하면서도 미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여전히 대규모 수익을 올리고 있는 현실을 보라. 미국은 중국을 변함없이 최대의 교역 파트너로 중시하고 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미·중관계를 주제로 한 최근 강연에서 ”미국 경제를 중국 경제에서 ‘분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성장하는 중국이 오히려 미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방정책을 통해 정치와 경제적 이익을 연계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도 절박한 일이다. 미래 성장동력인 이들 국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 국가와 관계를 강화해야만 동북아와 한반도 안보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가진 역할과 지위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친미 편중적인 외교와 경제 의존은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을 때 엄청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의 무기 구매를 위해 투자라는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었지만 미국은 포드를 통해 중국 배터리 기업(닝더스다이·CATL)에 투자는 물론 세액 공제지급 차종에까지 포함시켜주면서 한국은 제외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미국에만 의존하는 일은 우리의 자율성과 주권의 약화로 직결된다. 미국과 관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북방 지역 국가들과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다. 우리의 비전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정학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면, 더 나아가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는 '그레이트 게임의 핫스폿'이 되지 않으려면 주어진 지정학적 운명을 우리 스스로 타개하려는 자세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김영윤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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