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감추기 급급한 이란…리알화 폭락에 최악의 경제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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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혜 기자
입력 2023-05-0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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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급 인플레 돌파, 시간 문제

  • '제2의 베네수엘라'…리알화, 2018년 이후 14배 폭락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이란 의회가 레자 파테미 아민 산업광물통상부 장관을 해임하기로 의결했다. 죄목은 치솟는 자동차 가격에 대한 관리 부실이다. 표결 결과 유효표 227표 가운데 찬성표가 162표로 절반을 넘었다. 이란 의회의 전체 의석은 총 290석이다.
 
아민 장관은 6개월 전에도 한 차례 해임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당시에는 의회 표결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이번엔 교체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다수 의원들은 치솟는 자동차 가격과 상승하는 원자재 물가를 비판하며, 아민 장관을 탓했다. 아민 장관은 “(자동차 가격 등은 서방) 제재의 수위에 달려 있다”고 호소했고, 산업광물통상부는 가격 안정을 위해 내년 3월까지 10만대에 달하는 중국산 자동차를 수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탄핵을 막진 못했다.
 
지난 2021년 라이시 행정부가 출범한 후 경제 문제로 장관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난달에는 교사들의 임금을 늦게 지급한 책임을 지고 교육부 장관이 사퇴했다. 농업부 장관도 최근 교체됐다. 지난해에는 노동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교체했다. 하지만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은 여전하다.
 
경제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면서 정권을 향한 민심도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여대생 마흐사 아미니(22)의 ‘히잡 의문사’로 여성과 MZ세대가 주축이된 대대적인 시위가 이란 전역을 휩쓴 후 최근에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장관 축출로 경제 위기 못 막아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휘청이는 가운데 고립된 나라 이란 역시 인플레이션 충격에 흔들리고 있다. 다만, 이란이 겪는 인플레이션은 여타 나라와는 성격이 다르다. 지난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핵 협정에서 손을 떼고 광범위한 대이란 제재를 가한 뒤, 이란 경제는 만연한 인플레이션, 기록적인 자국 통화 가치 하락으로 신음하고 있다.
 
자동차 가격 상승 논란은 이란이 처한 경제 위기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이란 자동차 산업은 서방의 제재로 인해 품질 저하와 낮은 생산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방 제재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은 지난 2017년 외국산 승용차 수입을 금지했고, 이는 국내 자동차 생산량 감소와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라이시 정부는 주요 국영 자동차 회사들의 독점을 막고, 승용차 가격을 낮추고자 지난해 8월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그러나 한 번 오른 자동차 가격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이 역대급으로 치솟는 등 경제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이란 정부는 이를 감추기에만 급급하다는 점이다. 
 
이란 통계 당국은 지난 수십년 간 매달 인플레이션 수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올해 2월 이후 인플레이션 수치 발표를 중단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FT는 “이란은 지난 2개월간 인플레이션 지표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정권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치솟는 물가에 대한 증거를 숨기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 정부는 인플레이션의 무서움을 한 차례 겪은 바 있다. 지난 2019년 11월 휘발유 가격 인상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불만이 광범위한 시위로 이어지자 이란 정부는 실탄 사격을 허용하는 등 강경 진압을 펼쳤고, 그 결과 수백명이 사망했다. 이란 정부가 수치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의혹을 받는 이유다.
 
역대급 인플레 돌파, 시간 문제
이란의 2월(1월 21일~2월 19일, 이란력으로 11번째 달) 소비자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47.7% 상승했다. 애널리스트들은 1995년에 기록한 '49% 물가 상승'이란 최악의 고물가 기록이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사이드 라일라즈 정치·경제 애널리스트는 “정부 고위 당국이 이란 통계 센터의 인플레이션 지표 발표를 막은 것 같다”며 “정부가 최악의 기록을 돌파했다는 점을 피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팩트는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란 통계청은 자료를 산정하는 기준 연도를 변경하느라 수치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애널리스트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란의 한 경제 애널리스트는 “연도의 마지막 달에 새 기준 연도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FT에 말했다. 이란에서는 3월 21일에 한해가 시작된다.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경제 공약을 이행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라이시 대통령은 서방과의 핵 협정을 되살리지 않고, 서방의 제재를 해제하지 않고서도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주장이 무색하게도 경제는 악화일로다. 건축 자재를 판매하는 한 사업가는 “지난 1년 간 우리는 겨우 살아남았다”며 “경제 분위기가 너무 암울해서 단지 살아남기만 해도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지경”이라고 FT에 토로했다.
 
정부는 오히려 생계비 위기를 지적하는 언론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개혁주의 성향의 일간지 사잔데기는 올해 3월에 양고기 가격 상승을 비판하는 보도를 한 뒤 일주일 넘게 폐쇄됐다.
 
이란 강경파들은 그간 경제 위기의 원인을 서방에 문호를 개방했던 고(故)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Akbar Hashemi Rafsanjani) 전 이란 대통령의 탓으로 돌려왔다. 1995년의 역대급 인플레이션이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 재임 중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라프산자니는 재임 중 외국 투자 유치에 집중하는 등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을 펼치며 개혁적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강경파가 집권한 현재 최악의 고물가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은폐하려는 것이다. 
 
'제2의 베네수엘라'…리알화 바닥 모르고 추락
 
경제 저널리스트 레자 기비(Reza Gheibi)는 이란 인터내셔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고물가가 고착화할 것으로 봤다. 그는 "만약 50%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계속된다면 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변할 것이고 이란은 새로운 베네수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 급등의 주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란 통화인 리알화의 가치 추락이다. 서방 제재 강화와 경제 위기, 불안정한 정세 등으로 리알화 가치는 바닥을 모르고 하락하고 있다.

지난 1일 달러 대비 리알화 가치는 10% 급락한 55만 리알에 거래되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란 중앙은행(CBI)이 지난달 통화 시장에 개입하며 리알화 가치는 달러당 50만 리알까지 회복했으나, 다시 속절없이 무너졌다.
 
2018년 초, 트럼프 전 대통령이 JCPOA 핵 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을 때 리알화는 달러당 약 4만리알에서 거래됐다. 그 이후로 리알의 가치는 거의 14배나 떨어졌다.
 
특히 핵 협상이 지지부진하며 성과를 낼 가능성이 사라지자 리알은 대규모 매도세에 직면해야 했다. 이란은 러시아에 대한 무기 제공,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폭력 진압 등으로 인해 핵 협상 타결의 문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생활고를 못 견딘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왔다. 지난달부터 이란의 석유 및 석유화학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했다고 이란 포커스는 전했다. 파업은 에너지, 철강 분야 등으로도 번지며 전국 여러 도시로 확산하는 상황이다.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직업 안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1년 전 220달러의 가치가 있었던 일반 근로자의 월급은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현재는 120달러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는 한 가정이 겨우 9일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이란 인터내셔널은 전했다.
 
이란의 가정 주부 마리얌(49)은 FT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 위해 수치가 필요하지 않다. 구매력이 얼마나 빨리 떨어지는지 매일 느끼고 있으며, 가족의 미래가 너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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