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의 함께꿈] 민주주의가 망가졌다? …불붙은 프랑스 민심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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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 국립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입력 2023-03-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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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 교수]


보르도 시청사가 불에 타고 거리에 최루탄이 난무한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연금개혁 철회를 외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금개혁이 시민사회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래도 강행한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대통령 서명만 남았다.
연금개혁법이 발효되면 프랑스 국민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고 시위는 격화할 것이다. 마크롱 정치의 파산은 극우파 대통령의 출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우리는 이제 프랑스 민주주의의 위기를 목도하게 되리라.
사회당에서 정치 이력을 쌓은 엘리트 대통령 마크롱은 이미 초선부터 신자유주의적 우파 정치인의 본색을 드러냈고 전임 사회당의 정책을 모두 폐기했다. 사회적 약자의 삶을 외면하는 정책을 ‘혁신’을 앞세워 추진했다. 실로 오랜만에 2018년 내내 프랑스 국민은 ‘노란조끼’를 입고 실업률, 물가 상승 등 경제 문제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실정을 질타하는 거리투쟁을 벌였다.
지난해 5월 재선에 도전하는 마크롱과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의 재대결은 5년 전과 달리 박빙이었지만 프랑스 국민은 극우 정권의 탄생을 다시 한번 허락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민의 양심이 움직인 결과였다. 그래도 우파 정치인이 극우파 정치인보다 국민의 삶을 보살피고 국가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믿음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하지만 필자는 안동MBC 라디오방송에서 극우의 집권을 막기 위한 프랑스인의 선택이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정치적 지형의 외통수에 빠진 프랑스 국민의 선택은 지금 연금 개혁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물론 연금개혁은 그 첫 번째 대가일 뿐이다.
연금개혁안의 핵심 내용은 2030년까지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고, 근속 기간을 총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리는 것이다. 정부는 노동기간 연장과 근속 기간 확대로 재정 부담의 경감을 꾀하고, 반면에 노동자는 60대 중반까지 2년 더 일터에서 노동에 종사해야 하고 근속 기간을 채우기도 더욱 어려워졌다. 다시 말해서 연금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더 일찍 더 오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셈이다.
연금은 정부가 보장하는 국민의 노년 생계자금이다. 유럽식 연금제도는 노동인구가 퇴직인구를 의무적으로 부양하는 ‘세대 간 연대’이자 누구나 품위 있는 노년의 삶을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주춧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청년 세대가 적극적으로 마크롱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이유다.
1945년 이후 30년간의 경제성장을 토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설계된 연금체계는 노동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유럽인들에게 사회·노동 권리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다. 나아가 프랑스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특히 높아 ‘연금천국’이라는 부러움을 사고 있다. 중도우파 공화당, 중도좌파 사회당이 몰락한 프랑스 정치지형에서 마크롱은 이 체제에 도전하는 셈이다.
정부는 연금을 둘러싼 신자유주의적 ‘위기담론’을 지속적으로 유포한다. 올해부터 연금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고, 2030년에는 135억 유로(약 19조원) 적자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연금을 받으려면 세금을 높이거나 수령액을 깎아야 하지만 그래도 정년 연장이 나은 대안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노조는 작년까지 연금 재정은 흑자 상태였고 아직 심각한 위기도 아닌데 정부가 비관적 전망을 부풀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대신에 부유층 증세나 연금 삭감으로 균형을 맞추라고 요구한다. 국제 빈민구호단체인 ‘옥스팜’ 프랑스 지부에 따르면 프랑스 억만장자 42명에게 최대 2%씩만 세금을 올려 부과하면 연금 적자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양자의 주장에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
신자유주의자 마크롱에게 해법은 늘 시장과 금융에 있다. 그는 재선 과정에서 ‘맥킨지 스캔들’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프랑스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연금개혁, 디지털 전환 등 각종 정책 자문 비용으로 미국 컨설팅업체 맥킨지를 비롯한 민간 기업에 2021년에만 8억9330만 유로(약 1조2000억원)를 지불하여 2018년 지출(3억7910만 유로)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번 연금개혁안도 미국식 개인연금 방식, 즉 자본화의 논리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그 핵심이라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2019년 연금개편안은 민간 금융기관에 프랑스 연금 시스템의 한 축을 맡기고, 기본 연금 이외에 민간기업에 추가적 연금 보험을 반강제로 들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 기본 연금이 많으면 추가 연금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 정부는 앞장서 연금 재정을 줄여 연금액을 낮추려는 속셈이다.
당연히 개혁의 최종 수혜자는 기업과 자본가가 될 터이다. 2008년 글로벌 세계경제 위기가 발생한 이래 경기 불황으로 수익이 줄어든 자본가를 위해 국민의 연금을 털어 마련한 신자유주의자 대통령의 선물인 셈이다.
노동자에게 현저하게 불리한 개혁의 내용도 문제지만 연금개혁을 강행하는 과정은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보인다. 연금개혁안이 상원을 통과하자 마크롱 대통령은 헌법 49조 3항의 특별 규정을 들어 하원 표결 절차를 생략하겠다고 발표했다. 즉 긴급 법안의 경우 내각이 의회의 승인 없이 입법을 강행할 수 있는 헌법 조항을 적용한 것이다. 작년 총선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마크롱의 궁여지책이지만 근대민주주의 체제의 본산 프랑스에서 그런 사례를 바라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야당들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며 맞섰지만 연금개혁안을 지지하는 공화당의 비협조로 무산되었다. 이제 대통령 서명만 남았다. 긴급 조치권이 발동되자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 개혁에 반대하고 민주주의가 무의미해지는 것에 적극 반대한다"며 “우리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상황에 이제 질렸다”는 로이터의 전언은 의미심장하다(BBC코리아, 3월 24일). 정글 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극단주의가 확산하는 사이 의회 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금개혁안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저항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자본가의 이익을 지키려는 우파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계급투쟁에 가깝다. 또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파산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중도파 정당의 몰락으로 발생한 빈 공간을 차지하는 극우파의 짙은 그림자가 드러내는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 징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프랑스 국민은 파국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대선 직후 치른 총선에서 마크롱 집권 여당에 과반 의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파연합과 극우의 견제로 부자 감세와 연금개혁, 노동개혁 같은 마크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독주를 막아내기를 기대했다. 당시 정치평론가 니콜라스 도메나치는 “의회가 극좌와 극우의 쟁투가 벌어지는 아수라장이 될지 모른다. 강력한 거리투쟁을 국민은 기억한다”고 예측했다. 그대로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4년 뒤 프랑스 국민의 선택은 극우파 마린 르펜으로 귀결될 개연성이 한층 높아졌다. 만약 르펜이 당선된다면 프랑스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그들은 마크롱과 다른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 민족 정서에 기초한 힘의 우위를 강조한다. 이민자 추방이나 외국인 노동자의 핍박이 예상되어 사회적 갈등이 심히 우려된다.
무엇보다도 1945년 이후 평화와 연대에 기초한 유럽연합의 붕괴가 가시화할 우려가 크다. 극우 정치집단은 EU 역시 신자유주의적 연대와 시장 확대를 자본가의 약탈을 부추기는 기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미 영국이 EU를 탈퇴한 상황에서 유럽연합을 떠받치는 두 기둥인 독일과 프랑스 중 하나가 무너지면 유럽연합의 미래는 낙관할 수 없다. 프랑스에 이어 독일의 극우세력 팽창이 예상되며 이는 기존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둥지를 튼 극우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유럽연합은 폴란드와 헝가리 극우정권을 향해 재정 지원을 빌미로 언론 장악 및 반민주적 법률 제정에 제동을 걸고 있다. 이런 갈등이 결국 극우의 승리로 귀결되는 순간 유럽의 평화는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르펜의 집권은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프랑스혁명 기념일을 최고의 국경일로 기념하는 프랑스 공화국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히틀러가 서구 민주주의 체제 몰락의 산물이었다면 마크롱은 프랑스 중도정당 몰락의 산물이다. 서구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중심인 공화당과 사회당이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면서 르펜을 대통령으로 맞을 수 없었던 프랑스 국민은 이제 마크롱을 상대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모순을 겪고 있다.
프랑스 연금개혁은 마냥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정부도 연금개혁을 3대 개혁에 넣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경험 없는 대통령이 마크롱을 모델 삼아 연금개혁을 강행할 경우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 예상된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국민과의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근간)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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