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반년째 걸음마도 못 뗀 '외제차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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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지 기자
입력 2022-12-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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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법원을 혼란스럽게 하지 마세요."

외제차 사고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가 옥신각신하자 판사의 감정이 격해졌다. 여름에 시작한 이 재판은 새해를 앞둔 시점까지 제대로 된 시작도 하지 못했다. 차량 급발진 의혹에 운전자 측은 '제조사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제조사 측은 '감정이 안 된다'고 맞서고 있다. 자동차 재판에서는 본격적인 주장을 하기에 앞서 차량 검증이나 기술적 감정이 선행돼야 한다. 이 재판은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기술 감정은 운전자 실수나 제조사 잘못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차량에 어떤 결함이 있었는지, 오작동이 발생했는지 등을 분석하는 절차다. 그런데 이 재판의 결정적 문제는 기술 감정을 할 수 있는 '장비가 없다'는 점이다. 사고와 관련해 사실관계 확인이 어렵다 보니 무엇이 맞고 그른지, 누구의 주장이 타당한지 등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진퇴양난에 놓였다. 판사는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온갖 방법을 다 써보려는 판사의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또 하필 이 사건의 차량은 외제차다. 기술 감정을 위한 장비는 외국에 있다. "본사에 데이터 추출 장비가 있지 않냐", "장비가 없으면 자동차를 스위스로 보내야 하냐", "스위스에 없으면 스웨덴에 보내야 하냐", "데이터 추출이 안 되면 감정을 못하니 (재판을) 끝내야 하는 거냐" 등 앞선 재판에서 차분했던 판사가 이 재판에서는 속 터지는 모습이다. 

제3자 시각에서 취재하는 기자 입장에서도 답답한 건 매한가지다. 중립성을 잃으면 안 되지만 마음속에서는 감정이입될 수밖에 없다. 귀로는 재판부와 양측 입장을 듣고 손으로는 워딩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 가족이 이런 사고를 당한다면?' '이 재판의 당사자가 된다면?' 물 한 모금 없이 고구마 여러 개 먹은 듯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떠오른다. 책은 죽음이란 위기에 직면한 인간들에게 어떤 감정이 나타나는지를 잘 묘사했다. 먼저 자신에게 놓인 현실에 충격받는다. 그 다음 '이 위기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아주 냉담한 궁금증이 든다. 마지막에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강제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동료의 시체 앞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이 재판은 차량의 결함을 입증할 방법이 없는 '높은 벽'을 맞닥뜨렸다. 지금은 '기술 감정을 하면 되지 않을까?' 냉담한 궁금증이 드는 단계다. 원고 측은 "추출 장비는 서류 가방같이 생겼다. 그것을 보내주면 되는 건데 그걸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라며 장비를 직접 구해보겠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제 '적응의 단계'로 나아갈까 우려스럽다. '기술 감정이 안 된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기업 재판은 어쩔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국과 선진국 소송의 결정적 차이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제도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디스커버리는 직역하면 '발견' 의역하면 '의무적 공개'다. 재판 전에 필요한 모든 증거를 공유해 상대방의 패를 전부 확인하는 절차다. 패를 보고 재판을 '고' 할지 '스톱' 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이 과정에서 기업 등이 적극적인 증거개시를 하지 않으면 재판부는 법원에 대한 무시라고 판단한다. 실제 SK와 LG 간 배터리 전쟁에서 미국 국제무역위가 LG 측 손을 들어준 데는 디스커버리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외제차 사건 판사는 결국 "피고(제조사 측)가 장비를 구할 의무는 없다. 원고(운전자 측)가 갖고 와서 감정하라"하고 재판을 마쳤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시합이다. 결국 운전자 측은 이 사건 차량의 결함을 밝혀내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기술 감정 장비를 찾아야 하는 기나긴 여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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