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인공지능 판사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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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희 사회부 부장
입력 2022-09-1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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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희 사회부장

서기 2139년 핵전쟁 이후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도시 '메가시티 원'은 협소해진 공간과 제한적 자원으로 무질서한 범죄도시로 변질됐다. 정부는 질서 유지를 위해 궁극의 법정 시스템을 도입한다. '저지(Judge)'라는 엘리트 집단이다. 그들은 체포한 범인을 즉결 재판, 판결, 처형까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1977년 영국의 한 만화잡지에 연재된 '저지드레드' 내용이다. 만화는 어두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 만해도 대중들에게 아주 먼 미래에나 있을 법한 비현실적 소재로 인식됐다. 특히 복잡한 형사사법 절차를 현장에서 바로 판단을 내리고 형을 집행하는 장면은 1990년대 할리우드와 2012년 영국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오랜 시간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로 각광받았다.

현실 세계의 형사사건에서 최종 유무죄 판단이 내려지기까지는 통상 수년이 걸린다. 민사는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건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우리 생활 곳곳에 자리 잡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반 기술인 인공지능(AI)은 재판 속도를 높일 수 있는 핵심 요소로 평가받는다.
 
바둑기사 이세돌과 세기의 대결을 벌여 기억되는 '알파고 사건'이 일어난 2016년 미국 스타트업 로스인텔리전스가 개발한 AI 변호사 '로스'의 등장은 법과 기술을 일컫는 '리걸테크'란 신조어를 산업군에 포함시키는 계기가 됐다.

종전 키워드를 조합해 원하는 법률정보를 검색하던 방식이 아닌 자연어 검색기술을 도입해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 파악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국내 리걸테크 시장은 미국과 유럽 등 법률 선진국에 비해선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하지만 몇몇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국내 리걸테크 활용 빈도도 증가하는 양상이다.

수분 만에 고소장과 내용증명 등을 자동으로 완성해주고, 법률 문서를 등록하면 법령이나 판례를 자동으로 분리해 보여주는 수준까지 기술이 진화했다.

그렇다면 저지드레드처럼 인공지능 판사가 등장하는 날이 올까. 오래전부터 이 분야를 취재해온 필자는 인공지능 판사의 전면적 등장은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당사자의 최종 승복을 이끌어내지 못해 보조적 역할에 그칠 것으로 본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 역시 인간인 까닭에 개발자의 편향적 사고가 기계에 나타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법학자 대니엘 시트론은 "알고리즘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해 신뢰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어서 다양한 편견과 관점이 스며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판결은 때로는 시대의 울림을 주기도 하고, 또 그래야 한다. 이를 '명판결'이라 한다. 10년 전 성적 압박으로 모친을 살해하고 자기 집에 시신을 방치한 고등학생 A군에 대한 항소심 선고를 기억한다.

당시 재판장인 조경란 부장판사는 A군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을 아버지 품으로 바로 돌려보내지는 못하지만, 어미의 심정으로 피고인 부자가 의지하는 하나님께 피고인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피고인과 같은 사춘기 자녀를 둔 어미로서 피고인 부자의 죄책감과 고통을 가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일부 방청객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대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인공지능은 법률가들이 더욱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분쟁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입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특정 소송의 판결 결과를 예측하는 인공지능 법률정보 서비스 업체 '렉스 마키나' 설립자 조슈아 워커 박사의 말이다.

AI가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신속히 제공해 조력자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재판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결국 인간 판사다. 시대를 관통하는, 당사자에게 감동을 주면서 승복을 이끌어내는 현자들에게 역사는 환호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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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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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할 수 없고, 다만 조력자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인공지능 따위가 어떻게 인간을 대체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오만함에 더 가까워 보이네요.

    알파고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는, 감히 컴퓨터가 어떻게 바둑으로 인간을 이기겠어 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현재는 인공지능에게 바둑을 배웁니다.

    판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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