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 교수]


“교육부는 과학기술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만 의미가 있다. 혁신을 수행하지 않으면 교육부가 개혁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 7일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분야 인재 양성 방안을 주문하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다분히 노기가 느껴지는 위협적인 발언에 며칠 뒤 총리는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수도권과 지방에서 각기 1만명씩 증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수도권 대학의 학부 정원 총량을 제한하는 수도권정비계획법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고, 다수의 정부 부처(교육부, 기획재정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와 업계, 연구기관 등이 참여하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인재 양성 특별팀’을 만들었다. 이르면 내달 초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인재 양성 지원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대통령의 지시에 교육부가 신속하게 대책을 발표하자 반도체 관련 기업은 환영하는 분위기가 역력하지만 교육계와 반도체 전문가들은 고등교육 전반, 반도체를 둘러싼 학문 간 관계, 지역사회에 미칠 부작용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부정적인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반도체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학과 증설의 효과와 한계를 지적한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제약은 투자 재원이다. 반도체 인재 양성에는 막대한 투자가 따른다. 이는 대학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여서 현재 대학과 반도체 대기업이 취업을 전제로 하는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계약학과 제도 시행에 따라서 삼성전자는 성균관대·연세대·KAIST·포스텍과, SK하이닉스는 고려대·서강대·한양대와 손을 잡고 2023년 입시부터 360명을 선발한다. 대부분 서울 주요 대학에 편중돼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한정된 정부 예산으로 단기간에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학에서 반도체학과 증설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실험·실습을 위한 건물이나 토지를 확보해야 함은 물론이고, 기업에 마련된 실험·실습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이동수업 제한 규제를 완화해야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일부 전문가는 병역특례 할당 인원 증가 같은 인센티브가 있어야 학부생 정원을 늘릴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여기에 교수 확보 문제는 더욱 험난하다. 대학에서 강의할 반도체 전문 인력이 충분하지 않고, 그들 대부분은 이미 산업체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선 기존 교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립대든 사립대든 재정 여건이 충분하지 않고, 나아가 대부분 대학이 연공서열식 임금 체제로 파격적인 보상이 쉽지 않은 구조여서 교수 영입에 어려움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인재 양성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다수 있다. “반도체(계약)학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는 화학, 물리에서부터 전자, 자료, 기계 등 다양한 전공 능력을 조합하여 종합적인 반도체 기술이 완성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도체학과가 필요하다면 증원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학과(재료공학, 기계공학, 화학과 등)와 협의하여 복수전공, 부전공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 기존 학과 학생이 졸업학점 외에 반도체를 더 공부하고 싶다면 학·석사 통합 과정을 개설하면 된다. 장차 반도체학과가 확대되면 반도체를 둘러싼 다양한 전공들이 위축될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에서 이와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같은 맥락에서 “반도체(산업)가 잘되면 반도체학과를 늘리고 배터리(이차전지)가 잘되면 배터리학과를 늘리는 식으로는 지속적인 학과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곱씹어봐야 한다. 이런 지적은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인력 수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적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관료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여 씁쓸하다. 마치 공정라인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학과를 설치하면 산업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는 그릇된 교육관에서 비롯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현장형·실무형 인재 양성에 치우쳐 원천 기술을 떠받치는 인재 양성은 뒷전으로 밀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산업계와 함께 선언한 '2030년까지 종합 반도체 강국 도약'은 석·박사급 고급 인재 양성 프로젝트였다. 궁극적으로 대학은 기업 현장 투입을 위한 엔지니어 육성이 아닌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고급형 인재 양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둘째, 반도체학과 증설을 빌미로 수도권 대학 정원 동결을 해제하는 조치에 대한 지역 대학의 반응은 결사적이다. 경남 지역 한 대학교수는 “대안 없이 수도권 대학 정원을 늘려준다는 것은 지역 대학 죽이기나 다름없다.”고 일갈한다. 삼성반도체 총괄연구원 출신인 부산 지역 모 국립대 교수는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 정원을 늘리면 비수도권 대학 10개가 없어질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지난 23~24일 대구에서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하계세미나에 참석한 총장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러한 우려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교육부 출입기자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대학 학부 정원 총량 제한 철폐에 대해 비수도권 대학 총장 56명 중 52명(92.9%)이 반대했다. 이러한 반응의 이면에는 윤석열 정부가 내건 국정과제 85번 '이제는 지방 대학 시대' 표어에 기대를 걸었던 총장들의 실망감이 짙게 배어 있다.

윤석열 정부는 모든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는 구조를 완화하고, 어디에 살든 균등한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지방 시대를 약속했다. 또한 지방 대학의 인재 양성과 기업의 지방 이전에 대한 지원 확대 등을 통해 메가시티 (초광역권 중심으로 신산업 생태계를 육성하고 교통 인프라 등을 구축하는 시스템)를 조성하겠다고도 말했다. 물론 이러한 정부 대책의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래도 지역 대학 구성원들은 정부를 믿고 지방 소멸 위기를 막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 정원 증대는 이런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엇박자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의 공약이 그렇게 쉽게 뒤집혀도 되는가? 공약(公約)은 다만 정권을 잡기 위한 미끼일 뿐이며 정권을 잡은 뒤에는 간단하게 폐기할 수 있는 공약(空約)인가? 대통령에게는 야속하게 들릴지도 모를 이런 반문에는 대통령의 왜곡된 교육관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대통령은 정치 이력이 전혀 없는 검찰총장 출신이다. 검사동일체 원칙 아래 평생을 살아온 대통령에게 상명하복의 질서는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교육도 상명하복의 질서가 지배했고, 우리 사회 여러 영역이 그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러나 우리는 개발도상국 시절을 지나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우리 시민문화는 세계인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숙해졌다.

대통령의 지시에 공약도 뒤집고 교육정책, 나아가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정책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은 다분히 우려된다. 1970년대식 개발독재 교육정책으로 돌리겠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죽하면 어느 칼럼니스트는 “문교부 시대로 돌아간 교육정책”이라고 비판했을까. 교육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이다. 이해 당사자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자기 소신을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지대한 문제를 쾌도난마처럼 처리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드러낸 인문학에 대한 인식은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공학이나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하며 병행해도 되는 것이며 많은 학생들이 대학 4년과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2021년 9월 13일, 안동대 학생과 윤석열 후보의 환담) 이는 국정을 책임질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자로서 학문에 대한 이해가 몹시 우려되는 발언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자율과 창의로 만드는 담대한 미래’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교육에서 자율성은 기본 덕목이고, 창의적 사고는 국민 다수의 행복을 견인할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 자신은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이제는 지방 대학 시대'라는 멋진 공약은 반드시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함께 이행되어야 한다. 지방 대학은 나름으로 역사적 소명을 갖고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지역사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대학이 사라진 이후 지역사회는 상상만으로도 악몽에 가깝다.

지방 대학 시대를 열기 위한 주요 과제들을 세심하게 검토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정부는 지역 대학에 대한 지자체의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대학에 대한 행정·재정 권한을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위임한다고 했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이에 대한 총장들의 반응이 이를 입증한다. 앞서 말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9명 가운데 45명(50.56%)이 찬성했고, 44명(49.44%)이 반대했다. '대학 정책에 대한 지자체의 전문성 부족'(29명, 65.91%)이 가장 큰 반대 이유였다. 그다음으로는 '지방 토호 세력과 대학이 결탁할 우려'(7명, 15.91%)를 꼽았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 기술 인력 양성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력 양성의 과정과 절차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시행함으로써 학문과 산업계의 미래, 그리고 이해 당사자 간 충돌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방 대학 시대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새 시대를 여는 정책은 정권 초기의 동력으로 추진해야 한다. 지난 정권의 고등교육 정책에서 핵심은 공공성 강화였다. 하지만, 정권 초기에 대학 입시의 논란에 빠짐으로써 고등교육 정책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진정한 지방대학 시대를 열어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객원교수(2016~2017)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2020.07~2022.06)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 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해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2022) 공저 △교수신문 논설위원,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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